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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옥

수필가

오늘밤은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내일이면 새 아파트로 가니 22년간 정든 이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이집에서 아이 둘을 키워 혼인시켰으니, 나의 젊음을 여기서 모두 보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난다. 때로는 좋은 일이 아닌, 아픈 일이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했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사학년 때 이집으로 이사 왔기에 시내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고 삼년 간 다니느라 고생했다.

체력이 딸려 성적이 떨어지는 걸 모르고 아이를 잡았다. 어느 날, 아이가 버스에서 내리면 매일 들러 속내를 털어 놓곤 했다는 문구점 주인으로부터 대화 좀 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버스타고 다니는 것이 힘들고, 학교가 달라 동네에선 친구가 없고, 성적은 떨어져 부모에게 불효하니 너무 속상해 죽고 싶다고 말했다는 거다. 그날의 충격이라니…. 그 일이 약이 되어 우리는 교육방식을 수정했고, 아이는 다행히 잘 자라 주었다. 인생에게 매듭이 주는 의미는 무얼까. 하루, 일주일, 한 달, 한해가 주는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머물러 있지 말고 앞으로 나가라는 것일 게다. 이집에 살면서 행복했던 일도 가슴 아팠던 일도 이젠 매듭을 지어 추억의 장으로 넘기자.

새집으로 옮겼다. 짐을 풀자마자 버리는 일부터 한다. 전에 살던 집에서 많이도 버리고 왔는데 짐을 풀며 정리하자니 버릴 것이 또 나온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솜이불을 삼십년 넘게 보관하다 경전처럼 끌고 왔는데 결국 버리고 말았다. 요즘 짓는 아파트는 베란다확장형으로 설계하다 보니 창고칸막이가 촘촘하여 넣을 수가 없다. 붙박이 옷장 역시 여의치 않다. 어머니숨결이 새집까지 끌려와선 폐기물로 나간다. 옷장을 열 때마다 존재를 확인하고 내 것이라며 든든하게 생각했었는데….

인터넷을 이전 설치하려면 집소유자 주민등록증이 필요하단다. 남편에게 가져오라고 연락했더니, 소유주를 내 명의로 했으니 나의 것을 보여주란다. 이집이 진정 내 집일까. 줄을 긋고 내 것이라 주장하면 내 것이 되나. 22년간 내 집이라며 살았던 아파트 벽은 옆집과의 경계요 바닥은 아랫집, 천장은 위집과의 경계였다. 내 것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공간뿐이었다. 공간에 머물며 그 공간을 언덕삼아 아이 둘을 업어 키웠다. 만져지고 보이는 내 것은 언젠가는 떠난다. 아끼던 세간들도 옷도 싫증나거나 변질되면 떠나보내야 했다. 숨처럼 여기던 이불도 버리고 내 집이라고 못하나 박는 것도 아까워했던 긴 세월 함께한 아파트마저 팔아 버렸다.

떠나지 않는 진정한 내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닌,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정신이나 마음 공간 같은 것이거늘, 너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며 살았다. 종일 땅따먹기 하다 밥 먹으라 부르는 어머니 음성을 듣자 애써 따놓은 땅을 그대로 두고 집으로 달려가는 아이처럼, 언젠가는 그렇게 이 땅을 떠날 것이다.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무언가. 22년간 벽에 걸렸던 액자를 떼어 냈을 때 반듯하게 보존 되어 있던 벽지 같은 초심, 철지난 옷을 찾아다니며 발품 팔아 살뜰히 이룬 집장만의 감격에 잠을 설쳤던 젊은 날의 순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 내안에 자리한 어딘가를 향한 그리움들, 그런 것들이야 말로 버릴 수 없을 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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