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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선

충북환경운동연대대표

지난 17일 부산 문인들이 충주를 찾았다.

첫 방문지인 탄금대는 갑자기 밀고 내려온 북풍에 휘날리는 낙엽들처럼 산만했다.

수십 년 더 쓸 수 있는 콘크리트 정자 ‘탄금정’은 최근 사라졌다.

뿌리까지 들어낸 자리엔 벌건 흙구덩이가 피를 토하듯 방문객을 맞고 있다.

우륵선생의 가야금에서 연원이 돼 ‘열두대’란 이름이 생겼다.

절벽바위의 몸통과 시퍼런 강바닥에 다리를 굳게 딛고 있는 듯한 위용은 데크목으로 덮였다.

겨우 정수리만 나와 조경석처럼 보인다.

“저 다리(우륵대교)는 왜 서 있는 거예요?지난번엔 없더니만....... 더 이상 아름다운 경치는 볼 수가 없어요.”라며 여러 분들이 진한 아쉬움을 토해 내셨다.

이어서 방문한 ‘감자꽃 노래비’도 이곳을 방문하는 누구나 들리는 장소다.

어느 몰지각한 사람이 뜯어간 청동판 대신 오석판에 새긴 시(詩)도 띄워 쓰기가 틀린 채 긴 시간 동안 관광객을 맞고 있다.

마치 일그러진 충주의 영혼을 보여주듯이. 대형버스가 다니기 힘든 길을 올라와서 회전하기도 힘든 좁은 주차장을 나와, 버스는 중앙탑을 거쳐 노은초등학교로 왔다.

체육관도 조회대도 크고 깔끔하다.

헌데 가린 것 없이 몸통이 완벽히 잘린 나무가 참혹하게 서 있다.

왜정 때 확산된 조경수 가지치기는 한국에서 더 왜곡돼 이젠 어디를 가나 몸통이 잘린 나무가 즐비하다.

정작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오십 명 전후인 학교에 이삼천 명은 호령할 조회대를 만들고 뒷산 이름을 따서 ‘보련대’라고 붙이면 어린이들이 저절로 호연지기가 커지는가?

이천년 전 유대 땅에 오신 큰 형님도 말씀하셨다. 눈앞의 나무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고개를 돌려야만 볼 수 있는 산을 사랑한다고 하느냐고.

학교 뒷문으로 가니 신선생님 생가가 한결 가까웠다.

먼지 쌓인 대청마루와 나뒹구는 가재도구를 보니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다.

사람이 그리운지 바둑이는 짓지도 않고 꼬리만 흔든다.

외지 문인들과 생가를 들리신 선생님은 무슨 생각이 드셨을까? 충주시에 공문도 보내고 다양하게 생가 수리와 문학관으로의 활용을 주장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팔을 걷고 나서는 시장도 공무원도 없다.

친일논란이 있는 이효석도 평창에선 영웅인데, 한국최고 시인에 대한 무례를 충주는 언제쯤 끝낼까?

선생님 시비(詩碑)가 있는 한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했다.

날도 춥고 방바닥은 지글지글하니 이쯤이면 막걸리가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다.

병(甁)이 날씬해서 가격을 물으니 만이천원이란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 막걸리 말고 소태 것 주세요?”하니 “그거 안 팔려서 안 갔다 놔요.”라는 답이 왔다.

순간 솟아오르는 감정을 누르는 사이 한 분이 냉장고에서 소주 몇 병을 들고 들어가셨다.

오늘따라 충주의 추한 모습을 보여드리니 면목이 없었다.

“이곳도 오래가지 못하겠네”라며 혀를 차는 분도 계셨다.

비내섬의 갈대와 억새는 세찬 북풍에도 신이 났다.

고즈넉한 정취에 몸과 맘을 맡기기엔 총총 내딛는 발걸음이 도와주질 않는다.

입담 좋은 문인들도 팔짱으로 가슴을 덮고 비내다리에서 쑥부쟁이섬 쪽으로 내달렸다.

비내길과 비내섬을 이어주던 가설다리는 지난 장마 전에 걷어 내 건너 수 없었다.

돌아가자니 찬바람으로 쉽지도 않다. 수십 명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 앙성온천에서 보내 준 여가용 수륙양용차가 서너 명씩, 한 삼십분 동안 건너 줬다.

간밤의 비로 강물이 불어나 물에 잠길 듯이 뒤뚱뒤뚱 건너는 짜릿함에 하루의 피곤이 다 날아갔다.

앙성의 한 인사가 만든 신선생님 문학관에서 강연과 사인회를 하시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생가복원은 충주시에 기대지 말고 시민들이 만들어 가야죠.”하는 한 문인의 말이 가슴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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