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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

에코월드 대표, 역사·문화 여행전문가

미주와 달리 유럽에는 이민사회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학업중인 나이 많은 유학생이라 할 수 있다. 비자도 생활도 계속 공부중인 사회가 유럽의 한국인 생활모습이다.

그 속에 유일하게 독일과 오스트리아 정도가 이민1세대라는 호칭을 부여 할 수 있다. 그리고 독일에서 농사짓고 계신 분들 덕에 대부분의 여타 유럽에 위치한 한식당들의 부식재료를 공급받고 있는 형국이다. 독일의 이민세대는 다름 아닌. 광부와 간호사 분들을 말한다.

아프지만, 지금은 자랑스러운 그 시절 우리의 뜨거운 모습을 그 분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전쟁도, 배고픔도 생존에 대한 뜨거운 열의와 욕구도 없이 편안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거친 이 시대의 30대이다.

국내의 산업전선에서만 임했다면, 다큐멘터리로 혹은 글로서나 접할 수 있는 사소한 남의 이야기일수 있는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

가이드라는 직업 때문에 부모님 연배가 되시는 그분들을 몇 분 알고 있고, 가끔 인사도 드린다. 솔직히 광부와 간호사 이야기를 누군가가 체계적으로 알려주신 것을 접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지했다. 왜, 어떤 계기로, 누가, 몇 명이나, 언제 그곳에 갔는지.

배고파서, 일자리가 없어서, 나라에 돈이 없어서 국가 차원의 인력수출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배경설명을 통해 글을 어렵게 만들고 싶진 않다.

어쨌든 광부로 가신 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지하 갱도 초입에는 독일인이 일했고, 중간 깊이에는 독일과 2차 세계대전의 형제 국이었던 터키인들이 일했고, 막장에는 한국 노동자 약 500여명이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다고 한다. 한국에도 탄광은 많은데, 거기까지 갔다. 어쨌든 갔다. 그들이 일했던 현장엘 다녀온 적이 있다. 안전문제로 지하 400미터 지점까지만 허용이 되었다. 경험해 보기 전엔 표현하기 어려운 두려움과 힘겨움이 느껴진다. 폴란드 소금광산처럼 관광지가 아닌 지하 광산 갱도, 지하로 내려온 것만큼을 더 내려가면 일반인들은 적응하기조차 쉽지 않다는 탄광측 직원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우리 부모님 세대 중 어떤 분들은 이곳까지 와서 꿈을 위해 젊음을 보냈다.

나는 이곳을 여행하며 둘러보고 있다. 40년 만에. 표현하기 부끄러운 감사함을 느낄 뿐이다.

간호사로 오셨던 작은 체구의 한국 천사들의 이야기는 독일인들의 기억에도 아직 남아있다.

광부들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쉽지 않은 영안실 작업과 특수병동 시설로 배치되어 훌륭히 본업에 충실했던 천사들. 직접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와 악수했던 분들의 손을 잡아 보며 가슴속이 뭉클해지는 것은 왜일까. 동양에서온 가난한 작은 나라의 젊은 대통령 내외분의 손을 잡고 한없이 울었던, 힘없는 나라의 통곡과 눈물의 바다에 직접 자리했던 그분들이 오늘날 우리가 있게 한 원동력 중에 또 하나의 축이었다.

대부분 현지인들보다는 동포끼리 혼인들을 많이 하셨다.

출산이후에 그들의 산후조리법으로 몸이 다 망가지신 이야기는 정말 가슴이 아프다.

친정이고 시댁이고 아무도 없이 젊은 부부가 미역 한번 제대로 먹어 보지 못하고, 출산 이후에 병동에서 찬물에 하라는 샤워 다하고, 열 달 동안 열 덩어리 아기를 배에 넣고 있었다고 얼음을 먹으라고 가져다 주지 않나. 다 들고 일어난 치아가 성할 세도 없이 식사라고 스테이크를 손바닥 만하게 가져다 주니, 배는 고프지 뭐라도 먹어야 젖은 돌겠지 싶으니 꾸역꾸역 먹고 나니, 나이 먹어 몸과 치아가 성한 분들이 안 계신다.

고종의 여권을 가지고 출발한 첫 이민자들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애니캥 농장]과 일제 침략기때 하와이로 [사탕수수 농장] 떠나간 분들의 이야기만큼이나 눈물 없이 듣기 어려운 삶을 이겨내셨다. 그 위에 우리의 오늘이 있다.

대부분은 모았던 돈으로 다른 사업을 하시거나, 더 많은 공부를 하시기도 하셨고, 대학병원의 수간호사로 아직도 드물게나마 현업에 계신다.

돈은 좀 모았지만, 독일의 백호주의로 인해 그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언어가 같은 스위츠랜드나, 오스트리아로 가서 정착하신 분들도 상당수 있다.

그 시대를 만들어 주신 부모님 세대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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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기업 돋보기 5.장부식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

[충북일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 국내 시장에 '콜라겐'이라는 이름 조차 생소하던 시절 장부식(60)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는 콜라겐에 푹 빠져버렸다. 장 대표가 처음 콜라겐을 접하게 된 건 첫 직장이었던 경기화학의 신사업 파견을 통해서였다. 국내에 생소한 사업분야였던 만큼 일본의 선진기업에 방문하게 된 장 대표는 콜라겐 제조과정을 보고 '푹 빠져버렸다'고 이야기한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에게 해당 분야의 첨단 기술이자 생명공학이 접목된 콜라겐 기술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분야였다. 회사에 기술 혁신을 위한 보고서를 일주일에 5건 이상 작성할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던 장 대표는 "당시 선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 기업으로 선진 견학을 갔다. 정작 기술 유출을 우려해 공장 견학만 하루에 한 번 시켜주고 일본어로만 이야기하니 잘 알아듣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공장 견학 때 눈으로 감각적인 치수로 재고 기억해 화장실에 앉아서 그 기억을 다시 복기했다"며 "나갈 때 짐 검사로 뺏길까봐 원문을 모두 쪼개서 가져왔다"고 회상했다. 어렵게 가져온 만큼 성과는 성공적이었다. 견학 다녀온 지 2~3개월만에 기존 한 달 생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