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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3.04.11 16:18:0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박걸순

충북대 교수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라고 시작하고 있다. 즉, 대한민국의 법통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있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임시정부가 기념한 4월 11일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부터 4월 13일을 임시정부 수립기념일로 정하고 매년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기념식을 거행해 오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인 임시정부에서는 4월 11일에 기념식을 거행하였었다. 이는 김구가 주도하던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韓民)'을 비롯하여 당시 중국에서 발행되던 여러 신문에서도 확인되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대한민국에서 그 수립기념일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을 4월 13일로 설정한 근거는 일제측 자료인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 1919년 4월 13일자에 '내외에 독립정부 성립을 선언'하였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이 자료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 직후 광분한 일제가 상해임시정부를 급습하여 문서를 압수하고 한국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실을 연표 형식으로 정리한 것으로서, 임시정부의 기록보다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부모님이 스스로 기념하던 생일을 그 자식이 엉뚱한 날을 생신이라고 기념하고 있는 꼴이다.

임시정부의 수립 과정

1919년 4월 10일 밤 10시, 상해로 집결한 민족운동가 29명이 회합을 갖고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의장은 이동녕이, 부의장은 손정도가 선임되었고 이광수와 백남칠을 서기로 선출한 후 역사적인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연 것이다. 회의는 밤을 새워 계속되어,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 통과시켰다. 회의를 끝낸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따라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짜는 4월 13일이 아니라 4월 11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임시정부가 즉각 공식적으로 출범할 상황이 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국무총리와 내무총장으로 선출된 이승만과 안창호는 미국에 있었고, 나머지 총장 등 각원들도 대부분 연해주나 북경 등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한 대한민국

1948년 제정된 제헌 헌법에는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라고 하였고, 1962년의 제5차 개정 때에는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라고 천명하였다.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명시한 것은 1987년 제9차로 개정된 현행 헌법에서이다. 이는 분단시대의 정통성 시비를 염두에 둔 개정이었다. 1948년의 정부 수립 때에 이승만도 대한민국의 기산을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으로 설정하여 '대한민국 30년'이라 하였다. 임시정부의 역사적 공과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의심할 바 없이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이다. 호적에 출생신고가 늦었다 해서 본래 생일이 아니라 호적에 등재한 날 미역국 끓여 먹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자기 부모가 미역국 끓여 드시던 생일이 아니라, 부모와 원수지간이던 옆집 사람이 부모 생일에 대해 한마다 한 것을 맹신하여 부모의 생신을 기념하는 어리석은 불효자는 없을 것이다. 4월 11일이 아닌 4월 13일을 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념하고 있는 우리가 그런 모습은 아닌지 반성해야 할 일이다. 수립일조차 제대로 기념하지 못하면서 정작 그 법통과 정통을 승계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는 단순한 날짜의 오류가 아니라, 헌법 정신에 위배됨은 물론 분단시대의 정통성과도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에 시급히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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