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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가 심은 소나무를 아시나요

440년 전 청주목사 재임하며 소나무 심어
동헌 마당서 풍파 견디다 1946년에 고사
청원군청 정문 화단에 기념비만 '덩그러니'

  • 웹출고시간2013.04.04 20:24:3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청원군 연규성 관광시설담당이 율곡 이이의 소나무 식재사실이 적힌 비석을 설명하고 있다.

ⓒ 김태훈기자
조선 중기 학문과 정계를 주름잡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삼장장원(三場壯元)'이라 불린 그가 조정이 아닌 지방,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자치단체장을 역임했던 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얘기다. 그것도 청주시장(옛 청주목사)을 지냈다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율곡 선생은 1564년(명종 19) 대과에 장원 급제한 뒤 예조와 이조,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에서 일했다. 1570년(선조 3) 관직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에 머물다가 1571년(선조 4) 6월 청주목사로 관직에 복귀, 이듬해 3월까지 10개월가량 청주동헌에서 일했다.

청주동헌은 청주목을 다스리던 정3품 목사의 집무실로 정식 이름은 '청녕각(淸寧閣, 도지정문화재 109호)'이다. 1978년 현재의 청원군청 건물이 지어질 때까지 임시 군청으로 쓰였다.

한동안 이 건물을 청주목 동헌으로 추정하거나 동헌의 부속객사로 봤으나 1989년 역사적 고증을 거쳐 청주목 동헌임을 인정받았다. 지금은 청주시 북문로 1가 청원군청 안에 보존돼 있으나 건물과 차량 사이에 둘러싸여 숨쉬기도 힘든 상황이다.

율곡 이이의 청주목사 재임, 그가 집무실로 쓰던 청주동헌과 더불어 놀라운 역사적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율곡 선생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동헌 앞에 직접 소나무를 심었다는 거다. 몸이 아파 관직을 그만두는 아쉬움과 청주에 대한 그리움을 소나무에 담았다고 전해진다.

300여년 지난 1886년(고종 3)에는 소나무 옆에 비석이 세워졌다. 율곡 선생이 소나무를 심은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금석문이다. 지붕돌을 올리지 않은 비갈(碑碣) 모양으로 비신(碑身)은 높이 105㎝, 폭 30㎝, 두께 16㎝다.

비석엔 '栗谷先生手植松(율곡선생수식송)'이란 해서체 글씨가 적혔다. '율곡 이이가 직접 소나무를 심었다'는 뜻이다.

아쉽게도 소나무는 미군정이 시작된 1946년 말라 죽었다고 한다. 지금의 비석도 동헌 앞에서 청원군청 정문 왼쪽 담장 밑 화단으로 옮겨졌다. 1978년 군청사가 새로 지어지면서다.

현재 비석 외에 율곡 이이의 소나무 식재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 사료는 없다. 청주시지와 문화유적 분포지도 등에 간략한 내용만 적혀 있을 뿐이다. 때문에 소나무와 비석의 원래 위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남아 있지 않다.

/임장규·이주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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