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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영동대 발명특허학과 교수

불현듯 달력을 보았다. 4월 5일 식목일에 청명(淸明)과 한식(寒食)이 겹친다. 한식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집안의 묘소를 손보는 중요한 행사가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이날은 귀신들이 활동하지 않고 손이 없는 날이라고 했다. 평소에는 혹시나 조상에 폐를 끼칠까 걱정되는 일도 이날만큼은 탈이 없다는 것이다. 이때 무덤을 손보고 비석을 세우거나 상석을 바꾸기도 한다. 이어 잔디와 흙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보통 겨울에는 흙이 얼고 녹는 과정을 반복한다. 잔디 뿌리도 들뜨게 되어 양분과 수분흡수를 못 한다. 새싹이 나오는 시기에 말라죽을 수 있다. 잔디를 살리기 위해 사람들은 흙을 꼭꼭 밟아 주거나, 봉분에 올라가 단단하게 다져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식은 조상의 묘소를 돌보는 중요한 날인지도 모른다. 한식은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로 꼽힌다. 한식날에는 조상에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풍습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즈음에 묘지를 보수하고, 잔디를 새로 입히는 모습이 목격된다.

지금은 핵가족 시대다. 조상에 대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있다. 당연히 묘지관리가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농촌에 남아 자식이 돌보지 않는 조상 묘 관리를 혼자 떠맡는 노인이 늘어나고 있다. "내가 죽고 나면 자식들이 어떤 조상인지도 모르는 묘는 모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내 묘만이라도 잘 관리해 주면 좋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찬가지로 풀이 무성할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네요" 고향 어르신의 탄식이다. 이러다 보니 관련 업계의 돈벌이도 어려워 보인다. 몇 년 전만 해도 비석이나 상석을 세우겠다는 주문이 밀렸지만, 이제는 옛말이라는 것이다. "청명, 한식이 되면 많은 사람이 조상을 찾아서 성묘, 벌초도 하고 이장도 하는데 근래 들어 많이 사라졌습니다." "산에는 후손들이 다녀간 지 오래된 묘지가 수두룩합니다." 어느 묘지 관리인이 자조 어린 말이다.

외국은 어떨까? 서구인은 조상의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은 매번 묘에 새 꽃을 갖다 놓는다고 한다. 때가 되면 묘지공원엔 묘 청소하는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부모나 조상을 위한 그들의 사랑이 느껴진다. 이래저래 한식날 전통이 해마다 시들시들하기만 하다. 특히 화장 문화가 발달하면서 봉안당과 수목장이 대두하여 한식날이 더욱 퇴색되고 있다. 수백 년간 이어오던 매장문화가 몇 해 사이에 큰 변화를 일으킨 셈이다. 이는 장례방식의 변화는 물론 추모문화의 변화에도 그 원인이 있다. 구석구석 화장 문화의 변화가 가파르다. 급기야 이색적인 화장기술들이 속속 탄생하고 있다. 살펴보자. 화장 시 알칼리 용액으로 가수분해하는 특허기술이 있다. 온실가스가 감축되며, 대기로 방출되는 수은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공해 상에서 처리하는 친환경 화장기술도 선보인다. 그 외에도 똑똑한 화장기술이 부지기수이다. 멀지 않아 상용(常用)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나라는 전형적인 지소인다(地小人多) 국가이다. 묘지 면적이 우리나라 주택 면적의 절반에 이른지 오래다. 설상가상 좁은 국토에 날로 무덤이 늘면서 문제도 만만찮다. 이런 문제가 화장 문화의 변화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의 쓸 만한 화장기술의 진보. 절대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계사(癸巳)년 한식날. 어김없이 묘소를 찾는 사람들로 붐빌 것이다. 조상에 대한 지극한 효심과 정성이 그저 반갑기만 하다. 한식날 친지들과 함께 화장 문화에 대해 진중(珍重)하게 토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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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평범한 직장인도 기부 할 수 있어요." 변상천(63) ㈜오션엔지니어링 부사장은 회사 경영인이나 부자, 의사 등 부유한 사람들만 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11월 23일 2천만 원 성금 기탁과 함께 5년 이내 1억 원 이상 기부를 약속하면서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의 충북 72호 회원이 됐다. 옛 청원군 북이면 출신인 변 부사장은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부모님을 도와 소작농 생활을 하며 학업을 병행했다. 그의 집에는 공부할 수 있는 책상조차 없어 쌀 포대를 책상 삼아 공부해야 했을 정도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삼시 세끼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아버지는 살아생전 마을의 지역노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했다. 변 부사장은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라왔다"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옥천군청 공무원을 시작으로 충북도청 건축문화과장을 역임하기까지 변 부사장은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아지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