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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예

수필가

하루 종일 날씨가 찌뿌듯하다. 오늘처럼 비가 올 듯 말듯 한 날은 기분이 울적하기 그지없다. 몸과 마음도 천근만근이다. 비라도 펑펑 쏟아진다면 답답한 가슴이 뚫릴 것만 같은데 도대체 비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만사가 귀찮고 짜증이 난다. 이런 날에는 따끈한 온돌방에서 푹 자고 싶다. 땀을 흘리며 한숨 자고 나면 훨씬 기분이 나아 질 것 같다.

실천에 옮기기로 하였다. 깊숙이 넣어 두었던 전기장판을 꺼내어 코드를 연결하고 가장 고온에 온도를 맞춘 다음 들어 누웠다. 서서히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눈이 감겨왔다. 온돌방은 아니었지만 묵직한 어깨와 시린 허리가 한결 시원하다. 나도 모르게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띠~띠~띠띠~띠~ 멀리서 버튼소리가 아련하게 들리고 현관문이 열리었지만 결코 단잠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애써 모른척하고 잠속으로 더욱 빠지려는데 누군가 자꾸 흔들어댄다. 간신히 눈을 뜨고 바라보니 남편이었다.

"우리 칼국수 해먹읍시다. 날씨 때문인지 따끈한 칼국수 생각이 나서 일찍 들어왔는데…"

남편이 느닷없이 칼국수가 먹고 싶단다. 순간 짜증이 나고 오만상이 찌푸려져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일어나기 싫었다. 정말 이 상태로 푹 자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랴. 마누라가 만든 칼국수가 먹고 싶어서 술 한 잔 할 기회도 마다하고 일찍 귀가했다는 것을…

우선 재료부터 살펴보았다. 다행히 칼국수 만드는데 필요한 기본재료들은 남아 있었다. 우선 멸치 다시 국물이 우려 나도록 준비해놓고 밀가루 반죽을 시작하였다.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아니라서 일까. 반죽의 농도가 잘 맞지 않아 여러 번 물을 첨가해가며 오래 주물렀더니 손목이 아파왔다. 어디 그뿐이랴. 반죽을 얇게 밀어서 칼로 가늘게 썰어야 하는데 도무지 얇게 밀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급하게 하느라 반죽을 숙성시킬 시간이 없어 대충했더니 성의 없는 티가 금방 보이는 것이 아닌가. 간신히 반죽을 썰어놓고 끓고 있는 다시국물에서 멸치와 다시마를 건져낸 다음 썬 칼국수를 넣어 한소끔 끓인 다음에 가늘게 채 썬 호박과 홍당무를 넣었다. 다시 끓기 시작하자 파, 마늘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한 후에 양념장과 겉절이, 찬밥 한 공기를 함께 차려내었다. 절차가 간소화 되고 재료가 생략되었지만 어찌 되었든 보기에는 그럴싸한 칼국수 상차림이었다.

"그래, 이 맛이야. 우리 집 칼국수가 최고라니깐."

남편은 찬밥 한 공기를 주저 없이 칼국수에 말더니 먹기 삼매경에 빠져 들었다.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힌 채 뜨거운 칼국수를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먹는 남편을 보니 갑자기 잃었던 식욕이 생겨났다. 남편처럼 찬밥을 한 숟갈 만 뒤에 겉절이로 칼국수를 휘어감아 한 젓가락 입안에 넣었더니 대충 만든 칼국수치고는 맛이 제법이었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졌고 온몸이 따뜻한 열기로 가득 찼다. 무겁기만 하던 몸과 마음이 어느새 가뿐하다. 참 이상하다. 기운도 없고 어깨도 무겁고 기분도 엉망이었는데 모두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문득 언젠가 TV에서 방영된 어느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일조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우울해진다고 한다. 이럴 때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우울한 기분을 풀어 준다고 한다. 우울해지면 자연스럽게 혈당치가 내려가게 되는데 내려간 혈당치를 올려주는 식품이 전분이 듬뿍 든 밀가루 요리란다. 탄수화물(전분)은 몸 안에서 당으로 바뀌게 되고 이 당은 사람을 진정시키고 스트레스를 저하시키는 작용을 한단다. 의외였다. 하루 종일 기분이 언짢았는데 그 기분을 말끔히 씻어준 명약이 바로 밀가루로 만든 칼국수라니......, 음식에 숨겨진 과학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남편은 유난히 밀가루 음식을 좋아한다. 칼국수는 물론이고 수제비, 부침개, 만두, 비빔국수 등을 즐겨 먹는다. 저녁을 먹고 으레 간식으로 김치전이나 부추전, 호박전을 해 달라기 일쑤이고 하다못해 라면이라도 먹어야 한다. 귀찮아서 과일로 때울라치면 버럭 화를 내기도 한다. 혹시 남편도 중년의 남자들이 대부분 느낀다는 허망과 쓸쓸함 때문에 혈당을 높여 준다는 탄수화물이 필요해 밀가루 음식을 즐기는 것은 아닐까. 슬쩍 남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먹고 싶은 칼국수를 먹은 탓인지 마냥 느긋하고 흡족해 보인다. 덩달아 내 마음도 편안해지는 흐린 날의 오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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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너 소사이어티 충북 72번째 회원' 변상천 ㈜오션엔지니어링 부사장

[충북일보] "평범한 직장인도 기부 할 수 있어요." 변상천(63) ㈜오션엔지니어링 부사장은 회사 경영인이나 부자, 의사 등 부유한 사람들만 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11월 23일 2천만 원 성금 기탁과 함께 5년 이내 1억 원 이상 기부를 약속하면서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의 충북 72호 회원이 됐다. 옛 청원군 북이면 출신인 변 부사장은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부모님을 도와 소작농 생활을 하며 학업을 병행했다. 그의 집에는 공부할 수 있는 책상조차 없어 쌀 포대를 책상 삼아 공부해야 했을 정도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삼시 세끼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아버지는 살아생전 마을의 지역노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했다. 변 부사장은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라왔다"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옥천군청 공무원을 시작으로 충북도청 건축문화과장을 역임하기까지 변 부사장은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아지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