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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섭

운천초등학교 교사

1997년 9월 1일, 강원도 양구군 비봉초등학교 고대분교장!

내게는 잊혀지지 않는 날과 장소이다. 첫 발령을 받아서 부임해 온 곳이다.

근무해야 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고 왔기에 그곳에 대한 기대는 무척 컸던 것 같다. 교육청에서 발령장을 받아들고 교감선생님과 함께 일단 비봉 초등학교로 갔다. 교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나는 그곳에서 근무를 할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시 교감선생님의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갈 때만해도 그 목적지는 잠시 다녀오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가까운 곳이겠지·'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자동차는 양구읍내를 벗어나 한참을 달린 후에야 작은 시골 마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고대 분교장!!

교실 2칸과 중앙 복도를 개조한 교무실이 있는 건물 한 동, 큰 도시의 한개 반이 나와서 뛰어놀면 비좁아 보일 듯한 운동장이 눈에 들어왔다. 큰 학교에 길들여져 있어서인지 나의 눈에는 그것이 왜 그리 작게 느껴졌는지…….

분교장님과 기사님 한분이 나오셔서 맞이해 주셨다.

인사를 나누고 고대분교에 대한 설명을 잠시 들은 후, 관사와 시설물을 돌아보며 자꾸만 가슴 속에 답답함만이 느껴졌다.

'이 곳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학교 소개가 끝이 나고 이제 전교생 모두와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돌아 왔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합해야 18명. 그들과 한 교실에서 대면을 했다. 내가 가르쳐야할 어린이들과의 첫 만남! 나조차도 선생님이 된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아, 가슴이 콩닥콩닥 뛰던 순간이다. 어린이들이 모여있는 교실로 들어갔다.

신기한 듯 쳐다보는 그 어린이들의 눈은 답답했던 가슴을 뚫어주는 맑고 시원한 바람과도 같았다. 모두 귀엽고, 정말 티끌하나 묻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었다. 이들과 함께 지낸다면 이곳도 정겨운 곳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고대분교의 첫날은 시작되었다. 담임을 하게된 1․6학년은 모두 8명이었다. 1학년 3명, 6학년 5명. 1/3은 잘라서 무대를 만든 교실은 두 개 학년을 합해도 넓게만 느껴질 정도다.

우리반 이름은 솜반이다. '솜'이란 사랑이라는 뜻이다. 나와 아이들, 서로를 남은 1년동안 사랑하자는 뜻에서 아이들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처음 선생님이 바뀌어서 혼란스러워하던 아이들도 하나 둘씩 적응을 해 나가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나를 '우리선생님'이라고 불러주었던 날, 일기장에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며 가슴 벅찬 설레임을 표현했고, 일요일에 파로호로 반소풍을 갔던 일, 학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과 밤 늦게까지 함께 특별활동과 모자란 공부도 했다.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단연 아주 특별한 약속 하나가 떠오른다.

다행스럽게 아이들은 나를 잘 따라주었고, 나 또한 아이들에게 애착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교정에는 국화를 비롯한 가을 꽃들이 피어나서 아담한 학교에 빛을 더해갔다. 그럴 즈음 처음으로 나의 제자들이 되어준 이 아이들과 평생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에 조금 색다른 일을 계획했다.

우리가 잠깐 서로를 잊는다고 해도, 그래서 소식조차 듣기 힘들어도 우리 이것만은 기억하자며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오늘로부터 20년 후 오후 2시에 우리가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더라도, 이 곳 고대분교에서 만나자는 약속이다.

각자 촛불을 하나씩 켜 놓고, 어떤 모습일지 모르는 미래의 자신에게 편지 한 장을 썼다. 20년 후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생각 때문인지 아이들도 신중하게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내려 갔다. 물론 거기에는 20년 후의 약속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편지를 쓰고 우리는 각자 새끼손가락을 걸고, 다짐을 하며 다시한번 약속했다.

약속식이 모두 끝나고 한 아이가 걱정스러운 듯이 질문을 했다.

"선생님, 만약에 우리학교가 없어지면 어떻게 하죠·"

아! 순간 학교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뜨끔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학교를 정말 아끼고 사랑한다면, 학교는 20년 후에도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을 거예요! 만약 없어지더라도 그 없어진 자리에서 선생님 이 기다리고 있을게요."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편지는 내가 보관하다가 약속 날이 다가올 무렵 아이들에게 다시 보내기로 했다.

어느덧 16년여가 지나서 지금은 충북 청주의 운천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때의 아이들은 각각 24살과 29살이 되어 있고, 학교는 안타깝게도 폐교가 되어 아이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얼마전 주말, 그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양구의 고대분교장을 찾았다. 폐교되었지만 학교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혹시 아이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했지만 기대로 끝나고 말았다. 가끔 보이는 마을 사람 그 누구도 날 기억하지 못했다.

앞으로 4년여가 지나면 약속한 날이 된다. 1학년은 28살, 6학년은 33살이 되는 해, 2017년 10월 31일 오후 2시…….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의 앞에 나타날까· 아이들의 모든 꿈과 희망이 이루어져 있기를 바란다.

조남필, 김진우, 우혜진, 이병주, 박동일, 김란희, 조선영, 우신해…….

어쩌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서 그냥 지나칠 지도 모른다. 혹시 그렇다고 해도 기억속에서 없어지기 전까지라도 그날의 약속을 생각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준다면 고맙겠다.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을 그들에게 나 또한 당당한 선생님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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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제천 공교육의 수장인 김명철 교육장이 취임 100일을 맞았다. 김 교육장은 인터뷰 내내 제천 의병을 시대정신과 현대사회 시민의식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학생 교육 활동을 전개하는 모습에서 온고지신에 바탕을 둔 그의 교육 철학에 주목하게 됐다. 특히 짧은 시간 임에도 시내 초·중·고 모든 학교는 물론 여러 교육기관을 방문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활동하는 교육 현장 행정가로서의 투철함을 보였다. 김명철 제천교육장으로부터 교육 철학과 역점 교육 활동, 제천교육의 발전 과제에 관해 들어봤다. ◇취임 100일을 맞았다. 소감은. "20여 년을 중3, 고3 담임 교사로서 입시지도에 최선을 다했고 역사 교사로 수업과 더불어 지역사 연구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 그 활동이 방송에 나기도 했고 지금도 신문에 역사 칼럼을 쓰고 있다. 정년 1년을 남기고 제천교육장으로 임명받아 영광스러운 마음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지난 9월 처음 부임할 당시에 지역사회의 큰 우려와 걱정들이 있었으나 그런 만큼 더 열심히 학교 현장을 방문해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1년을 10년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자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