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박선예

수필가

새해 벽두부터 강추위가 계속 되었다. 하늘과 땅, 집과 나무, 심지어 사람까지도 꽁꽁 얼어버렸다. 대규모 정전사태를 우려할 정도로 전기사용량이 늘자 정부에서는 전기사용제재조치를 발표하였고 뉴스에서는 연일 채소와 과일 값도 급등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올 겨울은 몸도 마음도 너무 춥다. 기분마저 우울하다.

"할머니 눈이다. 저기 눈이 온다."

손자의 손길 따라 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라하는 손자 손을 잡고 눈 구경에 나섰다. 우리뿐만 아니었다. 춥다고 집밖으로 나서지 않던 이웃집 아주머니도, 눈이 오면 치울 일이 걱정이라는 경비 아저씨도, 친구들과 학원에 다녀오던 아래층 학생도 활짝 웃으며 함박눈 구경에 빠져 있었다. 아파트와 이웃하고 있는 여고의 학생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눈싸움에 여념이 없다. 그 모습을 본 손자 녀석의 공격으로 우리의 눈싸움도 시작되었다.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자꾸 밀리자 녀석은 눈싸움을 포기하고 눈밭을 종횡무진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녀석의 노래를 듣노라니 갑자기 한 부녀가 생각났다

첫눈이 오던 어느 해 겨울날, 괜스레 들떠서 몇 몇이서 모였다.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눈 구경이나 하자는 이유에서였다. 일단 지인이 운영하는 악기점에서 모여 이동하기로 하였다

미처 오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머리에 잔뜩 눈을 뒤집어쓴 부녀가 손을 잡고 가만히 들어왔다. 옷차림이 허름하고 당당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우리는 모두 걸인이라 생각하였다. 주인이 얼른 일어나 그들에게 줄 잔돈을 준비하였다.

"얘는 제 여식인데 초등학교 3학년입니다. 어느 피아노가 좋을까요?"

남자 분의 조용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모두들 의아해 하였고 한편으로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적지 않은 액수가 부담이 되었는지 할부로 매매가 성사되었고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른들이 계약서를 작성하는 동안 아이가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더니 가만히 뚜껑을 열고 손가락 끝으로 건반하나를 눌렀다. 뒤이어 서너 개의 건반을 한꺼번에 눌러보더니 어느새 동요를 연주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창밖을 보라~창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계약서를 쓰던 주인과 아이 아빠, 그리고 우리들까지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갑자기 아이 아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가 다가와서 아빠의 눈물을 두 손으로 닦아주었다. 아빠의 눈물을 보고 아이도 눈물을 흘렸다.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느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악기점 주인도 같은 느낌이었는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등 뒤에서 꼭 안아 주며 참 잘 친다고 칭찬해주었다. 계면쩍었는지 그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어느 관공서 한 모퉁이에서 구두를 닦아 생계를 이어간다고 하였다. 피아니스트가 꿈이라는 딸에게 피아노를 사 주어서 너무 행복해 눈물이 나왔다며 활짝 웃었다. 열심히 일해 하루도 착오 없이 할부금을 갚아 나가겠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하며 악기점을 나갔다.

아이와 그분이 떠난 다음 오랫동안 우리들의 화제는 그들이었다. 그들이 남기고 간 감동이 컸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딸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첫눈이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눈발이 더욱 굵어졌다. 손자 녀석은 어느새 애기 눈사람을 만들어 놓고 나뭇가지로 눈썹을 붙이느라 여념이 없다. 참 예쁘다. 사랑스럽다. 저 녀석이 있어 정말 행복하다. 그래 좀 추우면 어떤가 물가가 오른들 어떠한가. 추우니깐 겨울이고 겨울이라 눈이 내려 내 손자가 저리도 행복한 것을.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