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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 단종, 그 한(恨)의 발자취를 걷다

강원도 영월 장릉과 청령포

  • 웹출고시간2013.01.06 17:44:2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겨울의 길이 하얗게 열렸다. 아침 8시에 출발해 느릿느릿 영월로 향했다. 눈이 그대로 얼어 곳곳의 빙판길이 함정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특히 산모퉁이를 돌때는 아찔할 만큼 길은 꽁꽁 얼어 차가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평상시 2시간 정도의 거리를 4시간 만에 강원도 영월에 도착했다.

이번 겨울여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능인 장릉을 거쳐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까지 둘러보는 일정이다. 단종의 묘가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8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정여각,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비각, 한식날 단종 제향 때 제물을 올리는 정자각이 있다. 그곳에서 영월 최고의 해설사라고 알려진 이갑순씨의 안내를 통해 단종의 슬픈 역사가 다시 열리고 있었다.

"단종임금은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린 사약을 받고 승하했다. 이때 단종의 시신은 강물에 버려졌는데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추상같은 어명에도 불구하고 몰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암장한 이는 영월호장 엄홍도였다."

이갑순 해설사가 가리킨 곳은 바로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정여각이었다. 붉은 홍살문을 통과하니 500년 전 세상으로 회귀한 듯 감회가 색다르다. 작은 언덕 위에 장릉이 눈에 들어왔다.


노루가 있던 자리에 암장한 단종의 능

숙부였던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1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단종의 한(恨)이 굽이굽이 서린 곳이 장릉이다. 다른 왕릉들이 낮은 지대에 모셔진 데 비해 장릉은 높은 산 정상에 위치해 있다.

"눈이 펑펑 내리는 추운 날이었지요. 호장 엄홍도가 한밤중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산길을 오르는데 노루 한 마리가 길을 막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사람을 보더니 훌쩍 자리를 떴는데 그 자리만 온기가 남아 임금님의 시신을 묻을 수 있었지요."

이갑순 해설사의 설명에 일행들은 추위를 잊고 귀를 기울였다. 엄홍도가 지게에 단종의 시신을 지고 걸었을 그 길을 천천히 걸어보았다. 500년이 흐른 지금도 그 한(恨)이 얼마나 절절했으면 매서운 한(寒)을 몰고 와 참배객들의 온 몸을 꽁꽁 얼리고 있었을까.

어린 단종의 무덤은 다른 왕릉과 달리 단출했다. 이갑순 해설사는 "장릉에는 곡장(曲墻) 3면, 혼유석(魂遊石) 1개, 명등석(明燈石) 1개,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 마석(馬石) 1쌍, 양석(羊石) 1쌍, 호석(虎石) 1쌍 등으로 배치돼 있다. 추봉된 왕릉이라 명등석의 밑돌과 가운데 돌 사이의 받침돌인 간석(竿石)과 봉분주위를 둘러싼 병풍석(屛風石), 무인석(武人石) 등이 없다. 특히 호위 동물석이 적은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애절한 그리움의 향이 가득한 청령포

장릉에서 단종의 애사를 전해 듣고 청령포로 이동하려는 발길이 더욱 무거워졌다. 흥겨운 여행의 분위기는 씻은 듯 사라지고 단종이 겪었던 아픔이 커다란 돌덩이처럼 가슴에 얹혀 왔다. 수원에서 온 정인애(54)씨는"이번에 대학에 들어간 아들과 함께 여행 왔다. 드라마나 책으로만 알던 단종의 애사를 직접 듣고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니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라며 아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자신의 아들 나이 또래의 어린 단종의 모습이 겹쳤던 것일까.

단종은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되어 노산군으로 감봉되어 유배를 떠났다.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청령포로 갔던 그 옛날의 유배 길이 얼마나 길고 처량했을까.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결코 밖으로 출입할 수 없어 섬이나 진배없었다. 동력선을 타고 강을 건너는 동안 여행객 정유식(40, 서울)씨는"참 신기하다. 그 옛날 어떻게 이런 장소를 발견하여 유배지로 삼았을까"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수많은 소나무 군사에 둘러싸인 단종어소

배에서 내리자 우리를 반기는 것은 천년의 숲, 송림(松林)이었다. 알싸한 겨울 숲의 향기를 맡으며 여행객들은 유배지 단종어소로 향한다. 곳곳에 아름드리 붉은 적송은 거북 등처럼 쩍쩍 갈라져 있어 세월의 풍파를 실감하게 한다. 5분 정도 걸으니 울창한 송림 속에 단종이 두 달간 유배되었던 단종어소가 보인다. 현재의 단종어소는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재현한 것이다. 어소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렀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보인다. 방마다 밀납인형으로 단종의 모습과 신하, 궁녀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소나무 숲을 거닐다 보면 유독 거대한 소나무가 눈에 띄는데 바로 관음송(觀音松)이다.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가 단종의 유배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하여 관(觀)이며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여 음(音)이다. 하여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린다.


그리움이 강을 넘고 산을 넘다

청령포 뒷산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 층암절벽 위에 있는 돌탑이 하나 보인다. 이는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린 탑이다. 단종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 바로 이 망향탑이라고 한다. 두 달 동안 매일 이곳에서 멀리 서울 쪽을 바라보며 지난 시절의 기억을 담아 하나씩 얹어 놓았으리. 청령포를 휘돌아 가는 물결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무심히 흐르고 촘촘히 쌓아 올린 돌마다의 애잔함이 바람결에 들리는 듯하다.

1457년 뜻밖의 큰 홍수로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그해 10월 24일 유시에 단종은 17세의 어린 나이로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진언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절절한 마음이 아직도 행간에 담겨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윤기윤 기자 jawoon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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