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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현숙 교사

수곡초등학교

일에 파묻혀 지내다 보면 내가 교사인지 사무원인지 정체성이 불분명해 질 때가 많다.

풍성한 수확을 운운하는 결실의 계절 가을에는 교육 현장에서도 풍성한 결과물들을 쏟아내야 하기에 손이 가는 일이 많다. 수업시간에 아이들과 눈 마주치며 웃음 지을 새도 없이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야 하는 이즈음의 내 모습이 진저리나기 시작한 어느 날, 드디어는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어 보건실 침대 신세를 지고 있었다.

잠깐 쉬고 싶었는데 쉬는 시간 아이들이 우르르 보건실로 몰려온다. 친절한 보건선생님 덕을 보고 싶은 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렇지만 나도 좀 쉬고 싶은 데 .. 이크! 아프다는 재잘거림 속에 내가 가르치는 5학년 녀석들의 큼지막한 목소리도 섞여 있다. 딱 10분만 누워있다 가려고 했는데 이러다 저 녀석들에게 발각되면 10분 휴식이 물 건너 갈 것 같아 슬그머니 이불을 머리 끝으로 잡아 당겼으나 한 발 늦었다.

'아! 영어선생님이다'

조그마한 녀석이 목소리는 크다. 재훈(가명)이와 무리들이군. 우당탕.. 아이들이 내 쪽으로 몰려오는 소리.

'이런,.... 망/했/다.'

내가 미처 수습할 새도 없이 이불을 확 열어젖히며,

"영어선생님! 저 8개 맞았어요!"

보건실이 떠나가듯 외쳐대는 재훈이 얼굴에 흙먼지 얼룩이 먼저 보인다.

"어? 진짜?"

그냥 인사나 하려고 달려온 줄 알았는데 나를 찾아 헤메고 다닌 흔적이 역력한 녀석의 얼굴을 보자니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와~~ 대단한걸. 공부 진짜 많이 했구나."

녀석은 벌써 손을 들어 하이파이브를 하잔다.

"영어선생님, 아프세요?"

"응? 아니...."

엉거주춤 대답을 못 찾고 있는데 볼 일 다 본 녀석들은 제 말만 하고 벌써 우르르 몰려 나간다.

'나를 찾아 다녔었구나. 단어시험 8개 맞은 걸 자랑하려고.'

학년초 알파벳도 잘 구별을 못한 채 5학년에 올라온 몇몇은 정규교육과정 이외에 특별보충 지도가 시급했다. 친구들은 저만치 하루가 다르게 쑥쑥 실력을 키워 가는데 녀석들의 수준은 한참을 뒤에서 헤메고 있으니 수업을 따라 가기가 여간 힘들었을 것이다. 한시 바삐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주어야 했지만 수준차이도 제각각인 아이들을 전부 돌봐주기엔 늘 부족하였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교무실 구석에서 몇 분 씩 개별지도를 해 준다거나 원어민선생님과 코티칭할 때 잠깐씩 돌아봐 주고, 그러나 진득하게 공부하는 것보다는 소리를 지르며 신나게 뛰어다니는 것이 훨씬 즐거운 녀석들에게는 그마저도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일에 치여 지낼 때는 점심시간에 차마 교무실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이는 녀석들을 끝내 부르지도 못하고 그냥 돌려보낸 일도 허다했다. 그렇게 구박(?) 받으면서도 뭐가 좋다고 질기게 찾아오더니, 매일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하며 한 학기를 보냈는데 어느 새 밑 빠진 독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구나. 재훈이는 어제 중간고사에서 처음으로 76점을 받고 얼굴 가득 기쁨을 토해냈다. 지난 학기 내내 40점을 못 넘더니 기적같이 기어 올라 온 걸 생각하자니 가슴이 짠 하다.

맹자는 '득천하영재이교육지 삼낙야(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라 하였지만 나처럼 평범한 교사에게는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즐거움보다 포기하지 않고 곁에서 물을 부어주며 공을 들여 마침내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애잔함이 훨씬 큰 즐거움일 것이다. 내가 학교일이 바쁜 이유도, 내가 책을 보는 이유도, 내가 연구를 하는 이유도, 사실은 밑빠져있다고 내버려둔 독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을 붓는 것처럼, 틈이 생긴 아이들도 어루만지고 감싸 안아 아이들 하나하나 그들에게 꼭 맞게 채워주기 위해서 라는 것을 부디 종종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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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너 소사이어티 충북 72번째 회원' 변상천 ㈜오션엔지니어링 부사장

[충북일보] "평범한 직장인도 기부 할 수 있어요." 변상천(63) ㈜오션엔지니어링 부사장은 회사 경영인이나 부자, 의사 등 부유한 사람들만 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11월 23일 2천만 원 성금 기탁과 함께 5년 이내 1억 원 이상 기부를 약속하면서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의 충북 72호 회원이 됐다. 옛 청원군 북이면 출신인 변 부사장은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부모님을 도와 소작농 생활을 하며 학업을 병행했다. 그의 집에는 공부할 수 있는 책상조차 없어 쌀 포대를 책상 삼아 공부해야 했을 정도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삼시 세끼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아버지는 살아생전 마을의 지역노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했다. 변 부사장은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라왔다"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옥천군청 공무원을 시작으로 충북도청 건축문화과장을 역임하기까지 변 부사장은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아지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