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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중

전 충북도 행정국장

순전히 기억력이나 암기능력만을 가지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아니다.' 라고 평가 한다면 결단코 남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자만하던 때가 있었다. 평소에는 판판이 놀기만 하다가 시험보기 하루 이틀 전에야 책을 펴고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벼락공부를 해 시험을 쳐도 성적이 크게 떨어 지지 않던 학창시절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고, 군 복무시절 중대원(中隊員)들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서무를 맡았을 때 한사람에게 무려 8자리씩 주어지는 군번을, 그래서 자신의 군번 외우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무려 120여명 중대원의 군번을 모두 암기해 대원들이 휴가나 외출을 나갈 때 일일이 인사기록 카드를 펴 보지 않고도 단번에 군번 쓰는 칸을 채워 나갈 수 있었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나와서도 이런 암기력은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어떤 일을 할까 고민 고민 하다가 용감하게도 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하고 난생 처음 밤을 새워가며 정말로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국사, 헌법, 행정법, 행정학, 경제원론 등 다른 과목은 외워서 하는 과목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온 덕분에 처음부터 기초가 모자라는 영어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망할 놈의 영어 때문에 2번의 실패를 거듭하면서 2년이라는 허송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생각다 못해 무모한 일이긴 했지만 그 당시 영어의 바이블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 영어 참고서를 무조건 외우기로 하고 고집스럽게 실천에 옮겨 나갔던 것이다. 그 덕분인지 도전 3수만에 영어시험을 간신히 통과하고 7급 시험에 합격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방금 전에 들었던 이야기 까지도 돌아서면 쉽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퇴직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같이 근무했던 직장동료들의 이름까지 가물가물 할 때가 있다. 이런 현상은 나이가 들면서 매일매일 뇌세포가 조금씩 죽어 가면서 그토록 자신 있다고 믿어왔던 기억력에 이상 신호가 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뇌세포 활동이 활발했던 어린 시절에 반복적으로 학습된 농촌의 모습과 그 속에서 뛰 놀던 친구들과의 기억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어쩔 수 없는 노화현상 이라고는 하지만 정도가 조금씩 더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물론 이런 현상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진즉부터 이런 부분이 걱정되어 퇴직하게 되면 뇌세포가 죽어가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라도 외국어 하나 정도는 꼭 공부 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놓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지난 3월부터 인근 대학의 평생교육원에서 매주 월, 수, 금요일에 열리는 중국어 강좌를 수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요 며칠 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업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차를 몰고 강의실 앞에 도착해서야 책과 노트가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집을 다시 갔다 올 시간도 되지 않은 그야말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총을 들지 않고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나 책 없이 공부하러 학교에 간 내 경우가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때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꼭 맞는 말인지는 몰라도 건망증과 치매에 관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예컨대 친구와 약속을 했을 경우 이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약속장소에 나가지 못했을 때 본인 스스로 약속했던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건망증이고, 약속했던 사실 조차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치매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책을 집에 놓고 온 사실을 바로 기억해 낸 내 자신은 절대로 치매가 아니고, 단지 일시적인 건망증 현상일 뿐 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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