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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2.05.22 15:13:0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배상현

충주보훈치정 보훈계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또한 국립5·18민주묘지에 근무하기 전까지는 영화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대략을 파악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은 충주보훈지청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올해 초까지만 해도 나는 국립5·18민주묘지에 근무했었다.

국립5·18민주묘지에서 2년 넘게 근무 하여서 그런지 광주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에서 근무하고 있는 지금도 올해 5월이 가까이 다가오자 오월의 푸름이 한층 더해지는 민주묘지가 머릿속에 떠오름과 동시에 민주묘지에서 근무하기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아픔이 겹치면서 푸름은 마치 더욱 진한 전율로 내 가슴속을 메아리친다.

흔히들 세월이 약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벌써 올해로 32주년이 된 5·18민주화운동을 5·18 당시에 직접 느꼈던 5·18민주유공자들은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5·18민주화운동은 비록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10일 동안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운동은 갑자기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임진왜란과 동학혁명, 3·1만세운동과 4·19혁명 등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마다 국민이 일어나 목숨을 바치면서 나라를 지킨 자랑스러운 역사와 함께 그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18민주화운동의 직접적인 배경은 1979년 10월 26일 18년 동안의 유신독재 정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면서 전국에서 일기 시작한 민주화의 붐일 것이다.

국가권력을 군부대의 힘으로 강점하려했던 신군부 세력은 전국적인 민주화 바람에 불안감을 느껴 일부 지역에 내렸던 계엄령을 1980년 5월 17일 전국으로 확대했다. 5월 18일엔 광주지역에 계엄군을 투입하여 무차별적인 총격과 유혈진압을 감행하였으며, 통신 및 도로 등을 차단하여 광주를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시켰다.

광주시민들은 시민군을 조직하고 평화적 해결을 위해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하였지만 결렬되고 말았다.

5·18민주화운동 10일째인 5월 27일 새벽 4시 계엄군은 시민군 지도부가 있던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펴 1시간 10분 만에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로써 10일간의 항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항쟁과정에서 150명이 넘는 시민들이 사망하고, 70명이 행방불명되었으며, 3천명이 넘는 부상자, 1천명이 넘는 기타희생자를 포함하여 모두 5천명이 넘는 시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10일 동안의 항쟁이 보여준 역사적 평가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부도덕한 신군부의 독재정권보다는 자유민주주의를 원하였고, 인권의 존중과 평화를 위한 대화를 지속하였으며, 광주시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참하여 성숙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항쟁기간 중 시민들은 더러워진 도로를 청소하고, 부족한 식량을 서로 나누고, 부상자들을 위해 스스로 헌혈을 하면서 치안 부재의 광주를 자랑스럽게 지켰다. 5·18민주화운동은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스스로 뭉쳐 일어난 의병과 같이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주권재민의 참된 모습을 수많은 희생을 통해 교훈으로 보여줬으며, 이러한 정신이 후세에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길이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4월 내가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근무할 당시 제32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가 민주묘지에서 공식 출범하였다. 동 행사가 전국적인 행사로 추진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계 속에 광주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그날의 아픔이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키는 마지막 희생이 될 수 있도록 그날의 의미를 되살리는 5·18기념행사에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적극 참여하고, 국민들 또한 가족과 함께 참여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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