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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완

충청북도교육청사무관

효(孝)와 예(禮)의 계절이 찾아왔다.

나이도 오십이 훌쩍 넘고 자식 놈들도 다 커서 객지에 나가 있다 보니 가끔씩, 38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불현 듯 생각나곤 한다.

이제야 철이 드는가 보다. 이제야 부모 마음을 헤아리나 보다.

고향의 부모님 산소에 가고 싶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부모님 곁을 떠나 청주에서 유학을 했던 나는 일년에 두 번, 방학 때만 고향집에 갈 수 있었다. 청주에서 괴산 연풍까지 꼬불꼬불 170리 비포장길 완행버스 속에서 3시간여를 차멀미에 시달리다 보면, 동구 밖 신작로변 큰 미루나무 아래에는, 햇볕에 얼굴이 그을린 하얀 광목 바지저고리를 입으신 그리운 우리 아부지가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며 서 계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동이 막내 자식을 멀리 대처의 큰며느리에게 맡기시고는 밤낮으로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어릴적 이야기다.

휴가나온 형의 군화를 끌고 뜨락(뜰)을 오르다 넘어져 눈두덩이 찢겨 얼굴이 피범벅이 된 나를 들쳐업은 아버지는 십리 밖 읍내 의원까지 쉬지도 않고 내달리셨다. 피나고 아픈 것보다 넓고 포근한 아버지의 등에 엎힌 것이 참 좋았다. 한번은, 사랑방에 엎질러진 휘발유를 석유로 알고 불을 붙였다가 방을 다 태운 적이 있다. 두려움에 떨며 작은집 처마 밑에 숨어 있던 나를, 아버지는 온 동네를 수소문하여 구한 영사(경기, 토사, 곽란에 쓰이는 한약재)를 먹이시고는 꼭 안고 괜찮다며 등을 토닥여 주셨다. 그때의 아버지 품도 참 따듯했다.

내 고향 연풍은, 1960년대 북한에서 태백산맥을 거쳐 소백산맥을 타고 남하 하던 무장공비들이 자주 출몰하는 조령산이 있는 곳 이었다. 그때마다 연풍중학교 운동장은 육군 37사단 야전사령부로 이용됐고, 토벌작전을 수행중이던 경찰지서장이 공비의 흉탄에 전사하는 사고가 있은 후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해만 떨어지면 문밖 출입을 못하였다. 어린 나이였던 나는 저녁에 배가 아프면 외양간 옆에 있는 뒷간을 혼자가지 못하고 꼭 아버지를 문 앞에 보초를 세웠다. 그럴 때 마다 아버지는 '내가 어디 안가고 지키고 서 있으니 안심해라.' 는 뜻으로 소리 내어 천자문을 외우곤 하셨는데, 그 덕에 나는 천자문을 일찍 뗄 수 있었다.

흰 광목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즐겨 입으시고 술과 담배를 즐기시던 아버지가 무엇보다 좋아하신 것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연풍에 오일장이 서기만 하면, 약주를 건아하게 드시고 박하사탕과 유가사탕을 잔뜩 사가지고는 눈에 띄는 아이들을 모두 불러 나눠주셨다. 연풍의 사탕 할아버지셨다.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가끔 약주가 부족하실 때면 내게 술 심부름을 시키셨다. 심부름 값 받는 재미에 왕복 20리길도 마다 않고 누런 주전자를 들고 읍내 차부 앞에 있는 술도가에 가서 막걸리 한되를 받아 집에 돌아오면, 도중에 흘리고 맛본 것(·)이 반이고 반 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럴때면 살금살금 부엌으로 가서 물로 반을 채워 갖다 드리곤 하였는데, 아버지는 희석식 막걸리를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들이 받아온 막걸 리가 참 맛있다며 기분 좋게 드시곤 하셨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이 효였던지 불효였던지, 그저 죄송한 마음뿐이다.

어린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 형님댁에서 자라다 보니 사먹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럴때면 여지 없이 '아버님 전상서'를 썼다 급할때는 가끔 전보도 치곤 했다. '일금00원 급송 요망.'

아버님께서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를 말씀 하실 뿐 '이래라, 저래라, 해라, 하지마라.'는 말씀은 도통 하지 않으셨다. 어지간 해서는 혼내는 일도 없으셨다. 하지만 출타 하실때는 꼭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나로 하여금 느끼고 깨우쳐 스스로 알게 하신거였다. 집안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어머님과 함께 했지만 집밖에서는 늘 아버님 곁에 있었다. 안과 밖의 가정교육이 분명했던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지게를 지고 가시던 아버님의 뒷 모습이 그립다.

사립문 안 초가집 마루에 걸터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궐련을 피시던 아버님의 모습과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던 담배 연기가 보고 싶다. 약주만 드시면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차면 기우나니라."를 한시를 읊듯 흥얼거리곤 하시던 아버지.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그런 아버지가 내가 고등학교 1학년때 돌아가셨다. 아버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집에서 토종벌을 치셨는데, 아버님이 운명하시자 어머님께서 삼베천을 벌통에 매달아 놓으셨더니, 아버님 출상에 맞춰 그 많은 벌들이 마치 상복을 입은 듯 삼베 오라기를 조각내 물고는 벌통을 나가는 것을 보았다. 미물도 주인을 알아보는 세상섭리를 통해, 관심과 사랑 그리고 은혜에 관한 교훈을 주고 떠나신 아버지셨다.

얼마전 고향에 갔더니, 제때 벌초도 안하여 잡초가 무성하던 뒷산의 어느분 산소가 석물 등으로 근사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돌아가신 분이 알기를 하시나 다 즈그들 자랑하려는 거지." 하며 혀를 차시던 동네 어르신들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입에 발린 소리일지 모르겠으나 내가 부러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명절과 기일(忌日)을 비롯하여 집안에 좋은 일이 있을때는 부모님 산소를 찾는다. 이번달에는 만사제치고 아버님 산소를 찾아 잡초도 뽑고 좋아하시던 막걸리도 한잔 따르고, 산소 주위에 많이 나는 할미꽃도 캐다가 화분에 옮겨 심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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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우 충북도체육회장, "재정 자율화 최우선 과제"

[충북일보] 윤현우 충북도체육회장은 "도체육회의 자립을 위해서는 재정자율화가 최우선 과제"라고 밝혔다. 윤 회장은 9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3년 간 민선 초대 도체육회장을 지내며 느낀 가장 시급한 일로 '재정자율화'를 꼽았다. "지난 2019년 민선 체육회장시대가 열렸음에도 그동안에는 각 사업마다 충북지사나 충북도에 예산 배정을 사정해야하는 상황이 이어져왔다"는 것이 윤 회장은 설명이다. 윤 회장이 '재정자율화'를 주창하는 이유는 충북지역 각 경기선수단의 경기력 하락을 우려해서다. 도체육회가 자체적으로 중장기 사업을 계획하고 예산을 집행할 수 없다보니 단순 행사성 예산만 도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선수단을 새로 창단한다거나 유망선수 육성을 위한 인프라 마련 등은 요원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달 울산에서 열린 103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충북은 종합순위 6위를 목표로 했지만 대구에게 자리를 내주며 7위에 그쳤다. 이같은 배경에는 체육회의 예산차이와 선수풀의 부족 등이 주요했다는 것이 윤 회장의 시각이다. 현재 충북도체육회에 한 해에 지원되는 예산은 110억 원으로, 올해 초 기준 전국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