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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청주문화원이 개원한지 50주년을 맞았다. 청주시민의 문화센터 역할을 하고 있는 청주문화원은 그 위상이 하루아침에 정립된 것이 아니라 숱한 우여곡절과 반세기 동안 자구의 몸부림 속에서 오늘의 빛난 모습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6.25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57년 12월 5일 청주문화원은 문화에 대한 시민의 욕구와 미 공보원의 지원이 맞물리면서 시내 중앙공원에 위치한 노천극장인 청주시공관에서 현판식을 갖고 개원했다. 초대원장엔 김창기 씨가, 부원장엔 최병준 씨가 취임했다.

미 공보원에서 16mm 영사기 한 대를 대여 받아 청주·청원 일대를 순회하며 문화영화를 상영했고 미 공보원에서 제공하는 계몽잡지 ‘자유의 벗’, ‘자유세계’는 책이 부족한 당시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받는 읽을거리였다. 문화영화 상영 수입은 청주문화원 운영에 큰 힘이 됐다.

1962년 문화원 원사를 남궁병원 맞은편에 위치한 청주시립유치원 자리로 옮겼는데 ‘목조건물인데다 시설이 낡아 비만 오면 실내에서도 우산을 받치고 있었다’고 고(故) 최병준 원장은 남긴 글을 통해 회상했다.

문화원의 낙후성을 한탄하는 가운데 청주문화원은 2기로 접어든다. 이동학 원장이 바통을 이어받은 청주문화원은 도약기를 겨냥한다. 청주시민의 문화의식 계발과 더불어 백일장, 음악회, 웅변대회, 주부대학 운영과 더불어 가정의례준칙이라든지, 피임 교육 등 대 국민 홍보사업을 전개했다. 이는 문화원이 미 공보원과 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됐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역점사업이었다.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슬로건은 이때 전국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오용운 지사가 재직할 당시 청주 문화원은 처음으로 도지(道誌)를 편찬했고 그 후에 증보판을 냈다. 강석균 원장, 우영 원장이 재직 시에는 성장기에 해당한다. 이때(1976)는 ‘목요 강좌’가 인기를 끌었는데 그만큼 시민의식이 성숙해 있었고 교양에 관해서도 갈증을 느끼던 참이었다.

예산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 강좌는 다행히 각 대학교수진의 열의로 극복할 수 있었는데 한번은 좌파의 사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다뤘다고 해서 중앙정보부로부터 추궁을 당한 일화도 있다. 문화재사진전, 재경작가 초대전과 더불어 문화재 도록도 편찬했다.

우 영 원장 재직시절에는 세계어린이 미전, 글짓기대회, 재경작가 초대전, 농악대 창설 등 일련의 사업이 펼쳐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문화원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문화원이 무슨 중국집인줄 알고 “짜장면 시킨 것 빨리 안 가져 오냐”는 어이없는 전화도 종종 걸려왔다 고 우 영 씨는 회고한다.

그 후 재정난은 최악에 달해 전화료도 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문화 사업에 뜻을 둔 정기호 원장을 구원투수(?)로 영입하여 급한 불은 껐지만 얼마 안가 정기호 씨가 국회의원 출마로 문화원은 또 공백기를 맞았다. 이때 43세의 음악인 이종명 씨가 새 문화원장으로 취임해 15년 가까이 성장기를 주도했다. 문화원장을 하려면 학식과 덕망, 그리고 재력이라는 3박자를 갖춰야 하던 시기이기에 문화원장을 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인사가 별반 없었다.

이 원장은 재직 동안 청주청소년취주악단, 청주청소년교양악단을 창단했고 청주문화원과 일본 돗토리시(鳥取市)문화원연합회 간에 자매결연을 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돼 청주시~돗토리시 간에 자매결연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박영수 현 원장이 취임하자 청주문화원은 일대 변신을 꾀하며 발전의 행보를 가속화했다. 이사·회원을 정비하면서 문화원 자립기반 확충을 모색했다. 조직을 개편하면서 이사·특별회원·운영회원·향토사회원을 두고 문화원의 자활에 힘을 써왔다.

그 결과 상당액을 협찬 받아 의욕적인 새 사업을 벌였고 기관지인 청주문화의 판형 변경과 내용보완, 그리고 ‘내 고향 청주’, ‘청주문화기행’, ‘내 고장 문화유적을 찾아서’, ‘청주역사인물기행’ 등 출판사업에 비중을 두었다. 이외에도 실버학교 개설, 청주시티투어, 문화유적 순례단 운영, 민속장기대회, 청주문화원 오케스트라 창설, 남석교 다리밟기, 고구려 발해유적 답사, 학생국악경연대회 등 굵직한 현안사업을 강도 있게 펼쳐나갔다.

개원 5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개원 50주년 기념 ‘가곡의 밤’ ‘재경작가 초대전’ 등을 열었다. 그러나 개원 반세기를 맞도록 독립청사 없이 더부살이를 하는 것은 청주시가 해결해야 할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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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