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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타고 울려퍼진 '만세 메아리'

1919년 청주 우시장서 충북 첫 시위
한봉수 의병장·천도교인 등 앞장서

  • 웹출고시간2011.02.28 20:36:4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청주시내 곳곳에 걸려있는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끼며 시민들에게 3.1절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 김태훈기자
이 무렵, 총·칼을 앞세운 일제는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행정·산업·교통·금융·종교·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무단통치를 가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한민족은 분개했다.

1919년 3월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학생들을 주축으로 태극기 물결이 일었다. 고종 독살설을 타고 3월3일 전국이 들썩였다. 2개월가량 진행된 만세운동에 202만명이 모였다. 이 중 7천509명이 숨지고, 4만7천명이 구속됐다고 일제는 기록했다.

이 가운데는 청주군민들도 많았다. '독립운동사 제3권'과 '청주시지' 기록을 통해 91년 전 청주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월7일 읍내 우시장서 봉기

3 ·1독립운동 기록화

ⓒ encyber.com
1919년 3월2일. 일본 경찰에게 독립선언서 286매가 발각돼 독립운동 관계자들이 끌려갔다.

3월7일 읍내 우시장(서문장터) 입구. 한 남자가 마차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살포한다. 의병장 출신의 '번개장군' 한봉수다.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장꾼들에게 나눠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한봉수는 4월2일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내수보통학교 학생 등과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다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3월22일. 청주 장날이 들어섰다. 천도교인 민원식 등은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했다. 일본 경찰의 경계를 피해 군중 대열을 수백명씩 몇 갈래로 나눠 만세를 외쳤다.

4월1일. 청주시가에서 40리 정도 떨어진 산 위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모였다. 만세 소리가 횃불을 타고 번졌다.

4월2일. 다시 장날을 맞았다. 독립을 염원하는 벽보가 수없이 나붙었다. 극도의 경계태세를 갖춘 일제 경찰 탓에 시위가 늦춰졌다. 밤 10시 일대 산 위에서 수없이 횃불이 올랐다. 만세소리가 청주를 뒤덮었다. 일제 경찰은 총·칼을 앞세워 닥치는 대로 시위대를 붙잡았다.

그럴수록 청주군민들의 독립 열망은 점점 타올랐다. 미원면(3월30일~4월1일), 북일면(3월21일~4월2일), 북이면(4월1일), 강내면(3월23일~4월1일), 부용면(3월31일), 문의면(4월6일) 등 곳곳에서 만세 소리가 울렸다.

당시 청주지청에 기소된 주동자 122명 중 30대가 38명으로 가장 많았다. 25~30세가 25명, 20~25세가 23명, 40대가 20명이었다.

◇청주군 만세시위운동 특징

대부분 천도교계 인물이 시위를 주동했다. 민문식 등 천도교인 10명이 주도한 3월21일 북일면 내수리시장운동과 4월1일 미원면 미원시장운동이 대표적이다. 1880년대 청주지역을 휩쓴 동학은 이때까지 영향을 미쳤다.

청주지역 만세시위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봉화'다. 예로부터 국난을 봉화로 알린다는 풍습을 따랐다. 첫 횃불은 3월2일 밤 9시 청주군 강서면 대성리에서 올랐다. 유생 조동식이 주동했다. 24일, 26일 밤도 활활 타올랐다.

민초들의 만세 메아리는 봉화를 타고 북(北)으로는 진천·괴산·제천·경기, 남(南)으로는 보은·옥천·영동, 서(西)로는 충남 연기 등에 울려 퍼졌다.

/ 임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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