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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0.10.25 18:12:4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김두회

청주보훈지청 선양담당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과 기차안에서 회담을 갖고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사열을 마친 후 이토 히로부미는 당당한 걸음으로 기차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때 삼엄한 경비를 뚫고 한 젊은이가 뛰어나와 이토 히로부미를 정확히 겨냥하고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으로 저격하였다. 저격 후 이 젊은이는 러시아어로 "꼬레아 우라!"라고 크게 외치고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었다.

안의사는 피체 후 곧바로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감옥으로 이송되고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처형되었다. 안의사는 재판과정에서도 그 기개를 잃지 않고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를 들면서 한국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하였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안의사는 수감 중에도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고 수많은 유묵을 남기며 오로지 조국의 독립만을 걱정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안의사의 의거는 당시 국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중국에서는 소학교에서 수업 전에 안중근의 노래를 합창하였으며 중일 전쟁 후에는 연극 '안중근'을 통해 반일 투쟁을 고무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안의사의 의거는 동아시아 전역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쳐 결국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안의사가 옥중저술한 '동양평화론'을 살펴보면 안의사가 진정 원한 것은 조국의 독립과 더불어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일종의 평화공동체를 조성하여 상호 협력하에 서세동점의 제국주의를 막자는 취지로 이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먼 미래까지 내다 본 선구자적인 혜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안의사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주효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중국과 일본,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 요즘같이 자국의 실리를 위해서라면 타국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실리적이며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 전세계는 환율전쟁으로 치열한 경제싸움이 한창이다. 세계 경제대국의 패권과 자국의 이익을 놓고 벌이는 환율전쟁으로 자칫 잘못하면 우리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강대국 사이에서 유동적이면서도 실리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국익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상호협조하며 공존해 나갈 수 있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100년 전 안의사가 옥중에서 후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동양평화론'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G20정상회담이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된다. 지금 세계의 이목이 대한민국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G20정상회담 개최로 인해 대한민국의 위상과 역할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안의사가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유지를 이어받아 애국선열들이 목숨바쳐 지켜낸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더 큰 대한민국으로 발전시켜 후세들에게 물려줘야 할 것이다.

지금 서울 효창공원 애국지사 묘역에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분 독립운동가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하지만 그 옆에는 아직 주인을 맞이하지 않은 빈묘소가 하나 있다. 독립이후 백범 김구선생은 순국한 애국지사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여 묘역을 조성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안의사의 유골을 찾지못해 하나의 묘소는 비어있다. 그 동안 안의사의 유골을 찾기 위해 민·관 차원에서 수많은 조사가 이루어졌다. 2008년에는 건국 후 남북정부가 합동으로 안의사 유해 공동발굴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 달라'는 안의사의 마지막 유언을 우리는 반드시 지켜내어 효창공원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묘소로 모셔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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