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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무심천과 서울 청계천은 닮은꼴이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우선 하천의 길이가 비슷하다. 발원지점서부터 따진다면 무심천이 더 길 것이나 하천의 골격 정도만 비교하면 무심천이 12km이고 청계천이 11km에 이른다. 또 하천을 가로지르는 무심천의 남석교와 한양대 앞의 살곶이 다리도 유서 깊은 돌다리라는 점에서 공퉁점을 찾게 된다. 그전에는 살곶이 다리가 70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돌다리였으나 몇 년 전 청주대 건축과 김태영 교수가 실측한 결과 남석교의 길이가 80.85m로 나타나 살곶이 다리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다만 두 다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살곶이 다리는 사적 제 160호로 지정된 데다 사람들의 통행이 가능하고 남석교는 아직도 육거리 재래시장 안에 묻혀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하천은 단순히 물이 흐르는 공간이 아니다. 하천에는 그 지방의 역사와 문화가 흐르고 추억이 흐르며 뭇사람의 애환과 사랑이 흐른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남석교 근처 제일교회 앞에는 관리들이 지방 출장 시 묵었던 정진원(情盡院)이 있었다. 정진원에 묵고 있었던 성제원(成悌元:1506~1559)은 당대의 이름난 성리학자였다. 그를 연모한 관기 춘절(春節)은 갖은 교태로 유혹하였으나 성제원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둘은 산천을 유람하며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었을 뿐, 육체적인 사랑은 이루지 못했다. 그들이 남석교에서 데이트를 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코앞의 남석교를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심천 변에서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수많은 민초가 피를 흘렸다. 관군에 패퇴한 동학농민군의 시체가 쌓였고 포로로 잡힌 농민군이 이곳에서 처형됐다. 농민군의 급습을 받아 전사한 관군 73명의 위패는 모충사를 지어 배향하고 있는데 그보다 훨씬 많이 전사한 농민군에 대한 것은 기념비조차 찾을 수 없다. 앞으로 무심천 가꾸기는 치수(治水)와 더불어 이런 역사의 현장, 문화의 현장을 복원하는 일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류를 합해 중랑천을 거쳐 한강에 흘러드는 청계천은 서울 시민의 삶과 애환을 조선 초기부터 간직하고 있는 하천이다. 태조 이성계와 갈등을 겪었던 태종 이방원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역에 있던 묘석(墓石)을 뜯어다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광통교(廣通橋)를 놓았다. 이외에도 강수량을 측정하던 수표교(水標橋), 도성의 물이 빠져나갔던 지점에 있는 오간수다리(五間水門) 등 문화재가 널려있다.

청계천 주변은 기실 빈민이 모여 살던 곳이다. 서울시는 청계천을 복원하며 청계천 문화관을 짓고 그 앞에다 가난에 찌들었던 빈민들의 판자 집까지 복원하였다. 광명상회, 청계연탄, 또리 만화방 등은 1950~1970년대에 힘겹게 삶의 고지를 오르내리던 도시 서민들의 얼룩진 자화상이다. 우리의 치부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재현하여 관광 상품으로 까지 만들어놓았다. 개구쟁이 들이 드나들던 만화방,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으며 빵집을 누비던 추억의 책가방이 거기에서 추억과 향수를 내뿜으며 사진촬영의 무대를 제공하고 있다.

청계천 복원에 대해선 말들도 많다. 어떤 사람은 '큰 어항 같다느니, 대중목욕탕 같다느니' 혹평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도심의 휴식처이자 만남의 장소로 복원의 의미가 크다'고 찬사를 늘어놓는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하천의 본래기능을 살려냈다는 점이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고가도로와 문명의 외투를 강제로 뒤집어썼던 청계천은 이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삶의 공간으로서 역할을 다시 해내고 있다. 삭막한 도심에서 솟구쳐 흘러내리는 청계천은 문명에 지친 서울시민의 숨통을 틔워 준다. 청계천이 시작되는 청계천 광장은 만남의 장소요, 휴식을 취하는 명소가 되었다. 연일 수 천, 수 만 명의 시민이 이곳을 찾아 탁족(濯足)을 하며 더위를 더위를 쫓는다. 무심천은 청계천과 달라 청계천 복원사업을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장점은 벤치마킹하여 무심천 가꾸기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무심천에도 청계천 문화관과 비슷한 무심천 문화관을 만들어 무심천의 역사문화와 무심천 가꾸기 사업의 현황, 주변의 생태계 등을 소개하는 것이 어떨까. 콘서트 장도 들어선다면 다다익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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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