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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천은 청주의 어머니이다. 수천 년 동안 청주사람들이 그 젖꼭지를 빨아대어 말라 비틀어졌을 법도 한데, 피곤한 기색도 별로 보이지 않고 사시사철 생명의 물을 내륙의 분지로 흘러 보낸다. 청주사람이라면 그 포근한 어머니의 품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한여름이면 서문대교나 꽃 다리 아래에서 멱을 감았고 피라미 떼나 각시붕어를 쫓으며 무더위를 잊었다. 겨울이 오면 서문대교와 모충교 아래에 스케이트장이 들어서 하루해가 가는 줄 모르고 얼음을 지쳤다. 쓰리에스(3S), 세이버, 전승현 등이 당시에 유행하던 스케이트 메이커다. 그 스케이트를 자랑하기 위해 어깨에 메고 다녔다. 스케이트장 입구에는 날갈이 장수가 으레 있었고 생선묵(오뎅)이나 홍합, 꼬막 등을 파는 포장마차가 겨울언덕에 진을 쳤다. 꽁꽁 언 손발을 녹이는 데에는 연탄불에 데운 생선묵 꼬치와 국물이 최고였다.

1960년대까지 계속된 무심천의 낭만과 풍경은 1970년대로 들어서며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상 난동(暖冬)과 오염으로 무심천은 얼지 않았고 더 이상 멱을 감을 수 없게 됐다.

뿐만 아니라 무심천 둑은 가난한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였다. 당시에는 속칭 '재건 데이트'라는 것이 유행했다. 남녀가 데이트를 하는데 무심천 둑길을 걸으면 데이트 비용이 한 푼도 들지 않았다. 무심천 둑길은 비포장 도로여서 차량의 왕래도 뜸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그 길을 따라 무작정 걷다보면 어느새 까치 내(鵲川)에 도달하기 일쑤였다. 청주시민의 상당수가 여기에서 눈앞이 아찔한 첫 키스를 경험했고 이런 방식의 테이트를 통해 결혼에 골인했다. 더러는 불량배들이 출몰하여 행패를 부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무심천(無心川)이라는 내(川)의 이름부터가 상당히 철학적이고 시(詩)적이다. 전국 어느 하천이나 강(江)이름을 훑어보아도 무심천 만치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하천은 없다. 그 이름은 도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무심천이라는 하천의 이름은 대략 일제 초기에 생겨난 것으로 보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현재의 무심천이 대교천(大橋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구한말까지 '대교천'으로 불리다가 일제초기에 '무심천'으로 바꿔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런 추정은 1998년에 깨지고 말았다. 종래의 추정을 통째로 뒤엎는 물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고문헌에 전혀 등장하지 않은 '무심천' 기록이 느닷없이 옛 지도에 등장했다. 그 오랜 세월 역사의 행간 속에서 꼭꼭 숨어 있다가 비로소 세인의 눈에 띈 것이다. 서원향토사연구회가 1998년 8월,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열린 영남대 소장 '한국의 옛 지도 전'을 섭렵하다가 호서전도(湖西全圖) 중 청주목 지도에서 붓글씨로 깨알같이 쓴 '無心川'을 발견해 냈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이 지도에는 청주읍성이 선명하고 산천, 행정구역 등을 표기해 놓았는데 운천동 북쪽 봉림숲(북숲)뒤편을 흐르는 냇물을 '無心川'이라 적었다. 이로 보면 적어도 '무심천'의 천명은 2백여 년 전부터 현재처럼 '무심천'으로 불리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심천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으나 이중 불가(佛家)와 관련된 이야기가 가장 큰 설득력을 얻는다. '무심천'의 무심(無心)이란 자체가 불교 용어다. 예로부터 무심천 변에는 사뇌사(思惱寺:현재의 용화사), 흥덕사, 운천동 사지 등 절집이 많았다. 절집 곁을 흐르는 냇물의 이름은 절집과 하천의 어떤 교감에서 탄생한 것 같다. 무심천 이름의 보다 직접적인 근거는 고려 중기의 고승,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의 사상과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눌(知訥)의 선종 법맥을 이은 혜심은 사뇌사에서 여름 수련회격인 하안거(夏安居)를 했는데 그가 유명한 '무심론'자다.

무심한 무심천은 물 흐름이 급하여 장마철이면 천변의 주택과 농경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일쑤였지만 제방을 든든하게 쌓으면서 그 피해가 크게 줄었다. 근래에는 청주시에서 무심천 공원화 사업을 벌여 더욱 친숙한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수질도 1급수 판정을 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좋아졌다. 걱정스런 점이 있다면 갈대와 억새가 서걱대던 그 낭만의 공간이 외래종 동·식물에 의해 침탈된다는 점이다. 붉은귀거북, 베스, 브루길, 황소개구리 등이 토종 어류를 무차별 공격하며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다. 또한 '가시박'이라는 외래종 식물이 8m나 되는 긴팔로 토종 식물을 칭칭 감아 고사시키며, 민들레조차 외래종이 홀씨를 마구 날리면서 무심천 둔치를 점령해버렸다.

무심천에 대한 친환경 정비사업에는 필히 생태계의 여과작업을 펼쳐 건강한 하천, 건강한 휴식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방향을 설정해야 할 것이다. 논병아리가 발레를 하고 백로가 군무를 펼치며 청둥오리가 자맥질을 하는 그런 모습을 두고두고 보고 싶은 것이다. 청주시민의 추억이 흐르는 냇물 무심천에 문화 · 생활공간의 조성이라는 우리의 꿈을 띄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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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