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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에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은 반외세, 반봉건을 주창한 농민운동으로 그 후에 일어난 의병운동과 3·1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충북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남접과 북접이 모두 태생하고 활동한 특이한 지역성을 갖고 있음에도 정읍, 공주 등 다른 고장에 비해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현창사업이 매우 미진하다. 공주 우금치의 경우 기념사업회에서 오래전에 위령탑을 세웠고 동학군의 시체를 매장하던 '송장배미(용 못)'도 보존하고 있다.

갑오년 당시, 청주전투도 동학농민운동사의 한 획을 그을 정도로 평가되고 있으나 전투현장인 무심천 일대에는 그 흔한 기념비 하나 없다. 그해 9월23일, 약 1만 명에 달하는 동학군은 서장옥과 손천민의 지휘아래 청주성을 공격하였다. 동학군의 숫자가 이처럼 많자 관군은 성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방어에 주력했다. 그러다가 불시에 신식 무기인 스나이더 소총을 앞세우고 동학군을 기습하였다. 동학군은 서서히 후퇴, 육거리를 거쳐 무심천 건너까지 퇴각하였다. 동학군은 남다리(꽃다리)서쪽 제방을 중심으로 지금의 모충동과 남들에 진을 치고, 병영군은 남다리 동쪽제방에 진을 치며 며칠 동안 대치하였다. 관군은 동학군의 기세를 꺾을 요량으로 처형한 동학군의 시체를 불에 태워 육거리 부근에 쌓아놓기도 했다.

충북100년사는 그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9월 28일 병영군은 무심천 너머로 대포를 쏘아댔다. 굉장한 폭발음이었다. 쓰러지는 자도 있었다. 일부 동학농민군은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병영군은 재빨리 폭이 좁은 무심천 쪽으로 우회해서 건너와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학농민군을 기습하였다. 전쟁터로 변한 무심천 제방과 남들의 넓은 들판에는 선혈이 낭자한 동학농민군의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이 와중에 동학군이 관군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영관 염도희(廉道希)가 이끄는 관군은 진잠 등지를 순찰하고 대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10월 3일 한밭을 지날 때 동학군은 관군을 기습하여 73명을 살해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관군이 입은 가장 큰 손실이었다. 정부는 동학군을 진압한 후 모충사를 지어 이들을 배향했다. 모충사는 당초 남석교 밖에 설치되었다가 1903년 당산으로 이전되었고 1923년 고당 마을로 다시 옮겼다가 1975년 현재의 자리로 또 옮겼다. 현 모충동(慕忠洞)의 지명은 바로 모충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갑오년 당시 순국한 관군의 위패는 모충사에 봉안되어 기리고 있는데 그보다도 훨씬 많이 죽어간 이름 모를 동학군의 영령을 위하는 기념물은 그 어디에도 없다. 정읍의 전봉준 생가나 기념탑 조형물 정도는 아닐지라도 관군의 총검에 죽어간 수많은 동학군의 넋을 기릴 기념비 정도는 무심천 변 어디엔가 건립해야 할 것이다. 이를 외면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우리 스스로 폄하하는 자해 행위나 다름없다.

청원군 남일면 신송리 솔뫼 마을은 청주일대 동학군의 본거지였다. 솔뫼 마을은 평지에서 외돌아져 있어 외부에 쉽게 노출이 안 되는 곳이다. 또한 보은이나 회덕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연락의 고리 역할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이곳에는 손병희의 나이 많은 조카인 손천민의 대도소(大都所·동학본부)가 있었다. 이 대도소에서 손천민, 서인주, 서병학 등이 주동이 되어 동학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신원(伸寃)운동과 동학포교를 공인해 달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 대도소는 비록 폐가였으나 1990년대 까지만 해도 존재했는데 2000년도 초에 다시 답사해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는 배추밭으로 변해 있었다.

마을 뒤, 움푹하게 들어간 용대(龍垈)라는 곳에서는 동학군이 화승총과 함께 죽창, 죽칼과 태껸으로 군사를 조련하던 곳이다. 이곳 또한 마을 주민에 의해 그런 사실이 구전돼올 뿐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기념물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갑오년 당시, 관군의 기습으로 솔뫼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으며 그 후손들도 한동안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했다. 일부 동학의 후손들은 멸문지화를 당했거나 빈털터리가 되어 전국을 유랑하기도 했다. 1893년에 있은 보은 동학 취회는 동학농민운동의 서곡이었으며 보은 종곡 전투는 동학군의 마지막 결사항전이었다. 보은에서는 동학기념사업을 꾸준히 벌여오고 있는데 충북의 수부(首府)인 청주에서는 이렇다 할 기념사업이나 기념조형물 하나 제막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부서에서도 선뜻 나서 현창사업을 벌이지 않고 있다.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기념비 건립의 필요성을 거론하고 있으나 구체화 된 것은 아직 없다. 다른 곳에서는 청주 전투를 높이 평가하는 데에도 정작 우리들은 이에 대해 무관심하다. 남접과 북접의 함성이 드높았던 충북산하에는 이름 모를 들풀만이 민초들의 한을 대변하는 양 봄바람에 머리채를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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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