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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09.10.27 18:47:3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960년대~1970년대에 펼쳐진 새마을 운동은 제 3공화국의 국정 기조이자 철학이었다. 국민소득 200달러의 문턱에서 보릿고개를 힘겹게 오르내릴 때 잘 먹고 잘 살아보자고 펼치던 농촌부흥 운동이 바로 새마을 운동이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되는 새마을 노래는 정확하게 새벽 6시만 되면 동네 스피커로 울려 퍼지며 고단한 농민들의 새벽잠을 깨웠다.

기상나팔 소리와도 같은 이 노래를 들으며 국민들은 새벽청소를 했고 재건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직장들은 출근길을 서둘렀다. 인사말조차도 '재건합시다'라고 나누었다. 아이들은 일정한 곳에 집합하여 향우반 별로 등교했다. '먹뱅이(묵방리)' '바람불이(풍취리)' 깃발을 앞세운 아이들은 좌측통행을 하며 질서정연하게 학교 길에 나섰다.

이 운동은 농촌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라 도시나 공업지대에서도 동참했다. 거리 곳곳에서는 교통질서를 위반한 사람에게는 스티커를 떼는 것이 아니라 다음 위반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사각의 통 속에서 벌을 받았다. 미니스커트는 무릎 위 30cm이상은 안 된다 하여 지나가는 아가씨의 노출된 부위를 경찰관이 재었고 바리깡을 든 경찰관은 장발족을 붙잡아 정수리에다 고속도로를 내주었다.

새마을 노래처럼 우리주변에서는 초가가 없어지기 시작했고 마을길도 제법 넓어졌다. 때마침 충주출신인 허문회 전 서울대 교수가 주축이 되어 녹색혁명의 서곡인 통일벼를 만들어냈다. 종전에는 논 한마지기에서 벼 네 가마니가 나왔는데 통일벼는 거의 두 배인 일곱 가마니를 생산했다. 아키바레에 비해 밥맛이 덜했으나 사치스런 미각에 연연할 처지가 아니었다. 도시 곳곳에서는 공단이 조성되었고 이름조차 낯선 고장이 공업단지로 모습을 바꾸어나갔다. 부녀자들은 편물기를 들여놓으며 부업에 나섰고 처녀들은 섬유공장, 가발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서울로 몰려들었다. 청주에서는 구 시외버스 터미널 자리였던 사직동 일대에 남한제사 공장이 들어섰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그냥 '번데기 공장'이라고 불렀다.

들불처럼 번져간 새마을 운동 덕분에 우리의 삶은 차츰 윤택해졌다. 저개발 국가가 개발도상국을 거쳐 오늘날 OECD 회원국이 된 바탕에는 분명 새마을 운동과 새마을 정신이 포복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어렵사리 보릿고개를 넘어 GDP 2만 달러의 고지에 올라섰고 꿈으로만 여겨왔던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까지 이루어냈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의 역작용도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초가는 없어졌고 토목공사 과정에서 수많은 문화재가 멸실됐으며 고인돌, 선돌, 성돌 등이 수난을 겪었다. 개발의 논리 앞에 보존의 논리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고인돌, 선돌 일부는 깨어지거나 마을 입구로 옮겨졌다. '지, 덕, 노, 체'나 '하면 된다' 등 구호를 뒤집어 쓴 선돌도 이따금 발견된다. 마을 축대를 쌓는데 성돌이 이용되기도 했다. 미신타파라 하여 서낭당 등도 멀어져 갔다.

그것보다 더 흉한 것은 고속도로변 풍경이었다. 초가지붕은 다 벗겨지고 함석이나 기와로 새 단장을 했다. 토담집 위에 지붕을 다시 올리고 울긋불긋 페인트칠을 한 것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외국의 어느 농촌마을을 연상케 하나 가까이에서 보면 지붕만 바꾼 촌락이다. 그것보다 더 웃기는 것은 이른바 불란서 풍의 집을 짓는 일이었다. 왜 우리 농촌가옥이 불란서 풍을 본받아야 하는가 말이다. 불란서 풍의 주택은 A자형으로 물매가 급하다. 눈이 많이 내리는 북구(北歐)의 기후풍토에 맞게 설계된 주택이다. 즉 지붕에 쌓인 눈이 빨리 녹아내리도록 지붕 경사를 심하게 만든 것이다. 반달처럼 생긴 우리의 초가는 한 자 정도 쌓인 눈쯤은 넉넉히 받아들이는 구조다.

새마을 운동으로 주변에서 초가를 볼 수 없게 되니까 이제는 민속촌을 짓는다, 한옥 촌을 짓는다 하여 야단들이다. 삶의 방식이나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 해도 우리의 원형질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오늘날 각 지자체들은 과거 팽개쳐두었던 우리의 얼을 찾아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 정다운 동구 밖 길이 단장을 하고 있다. 충북에는 영·호남을 잇던 고개가 많다. 죽령, 조령, 하늘재, 추풍령, 괘방령 등이 그런 길이다. 청주에도 상봉재를 비롯하여 소미재. 미테재 등 옛 길이 여러 군데 달한다. 개발의 삽질에 밀려나긴 했지만 우리의 그리움은 늘 그곳에 머물고 있다. 반 토막 난 옛 길이나 그것만이라도 잘 챙겼으면 한다. 남상우 청주시장도 상봉재 옛 길의 보존을 시사했다. 새마을 운동이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다면 헌마을 운동은 정신적 풍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제는 헌마을 운동을 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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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