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우다

2024.09.22 14:57:41

문근식

시인

비가 온다.

오랫동안 내려져 있던 사무실 블라인드를 걷고 창밖에 쏟아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늘 사무실에만 갇혀있던 내 눈길이 창밖을 향한다. 빗속을 걸어가는 나의 시간과 시간을 따라 걷는 나의 시선이 점점 멀어진다. 따지고 보면 나의 시간이 늘 내 편은 아니었다. 시간은 늘 앞을 향해가고 나는 자주 반대편을 향해있다. 그럴 때마다 난 무엇인가 그리워지거나 우울해지곤 한다. 오늘처럼

아무도 없는 금요일, 비 오는 오후 두 시, 창밖이 잘 보이는 의자에 앉아 늘 같은 쪽으로 나를 끌고 가는 시간의 속도를 버티고 있다. 이럴 때는 빗줄기가 좀 더 굵어지고 빗소리도 점점 커져 내가 더 우울해지거나 슬퍼지는 것도 좋겠다. 아무도 없는 여기 사무실을 가득 채운 빗소리가 이유 없이 눈물이 되어 떨어지던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도 좋겠다. 참 멍때리기 좋은 날, 이 공간에서 손전화도 티브이도 벽에 걸린 그림도 사훈도 모두 지우고 나도 지워야지 그리고

오래오래, 내 마음의 발걸음이 앞서가는 시간을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책상 위 커피가 식고, 텅 빈 소파에 옅은 어둠이 쌓이고, 간혹 지나가던 이름 모를 사람들의 발소리가 멎을 때까지 이대로 시간의 속도를 버텨내야지.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간섭할 이유도 없는 이 열 평 남짓의 좁은 공간을 오래 빗소리로 채워둬야지.

비로소 빗소리가 멈추고 창밖에 하나둘 켜지는 가로등이 어둠을 밀어내면 난 애써 쌓인 소파의 어둠을 위해 블라인드를 내려야지 그리고 식은 커피를 마시며 어둠에 지워진 낯익은 것들을 바라봐야지, 무수하게 꽂혀있는 책장의 책들, 여기저기 벽에 걸린 액자, 숨죽여 소리만 내는 에어컨, 온종일 소리를 내지 않는 전화기,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이렇게 모두가 지워진 공간에서 오늘도 나와 마주 앉아 내가 늘 궁금했던 왜· 라는 질문을 던져 놓고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또 기다려야지. 그때 그 떨어지며 던진 목련꽃의 대답을 기억하며….

창밖 목련이 꽃을 피웠어요. 눈길 한번 준 적 없는데 가지마다 꽃을 매달았어요.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못내 낯설어 그대로 한참 바라다보면, 또 어둠이 공간을 채웁니다. 아직은 달빛이 잠을 깨기 전 그래도 목련이 빛나는 건 꽃잎마다 새겨진 사연 때문입니다. 바람 없어도 하나둘 꽃잎 떨구는 건 잊어야 할 사연 있기 때문입니다.

때론 그럴 때 있어요.

목련이 어둠 속으로 꽃잎을 지워가듯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어둠 속에서 오래 울리지 않던 핸드폰이 울린다. 퇴근했어요· 낮게 깔린 아내의 목소리, 전등을 켜고 한발 나의 시간으로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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