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무게

2024.08.18 13:58:54

박명애

수필가

요즘은 냉방기를 틀어야 잠이 온다. 강렬한 태양에 달구어진 도시는 열섬에 갇혀 밤이 깊을수록 뜨거운 숨을 쏟아낸다.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이웃의 잠을 방해할까 봐 늦은 밤이면 에어컨을 끄곤 했는데 올여름엔 그 작은 배려마저 접고 말았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열대야에 사람만큼이나 베란다 화초들도 곤혹을 겪는다. 아침이면 잔열이 남아있는 미지근한 바닥에 물을 뿌리고 지친 잎사귀들도 닦아주며 나도 모르게 한마디씩 건넨다. 우리 가족의 추억이 담긴 동백나무에는 올해 처음 꽃망울이 맺혔다. 한 뼘도 안되던 어린 묘목이었는데 세 해 만에 꽃을 맺으니 참으로 대견하다. 동백나무에게 속삭이듯 건넨 내 말은 낮은 파장으로 도톰한 이파리를 스쳐 요란한 매미 울음에 묻혀 사라진다. 가끔은 타인과 나눈 일상의 대화도 그리 지워졌음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하루를 돌이켜보면 식물들과의 대화로 시작해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참 많은 말을 한다. 나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도 적지 않지만 대개는 타인과 나누는 대화가 대부분이다. 장소나 목적에 따라 주제가 달라지긴 하지만 생각을 전하고 느낌을 나누며 공감하는 시간이 즐겁다. 갑자기 대화가 끊기거나 어색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을 때면 별 의미 없는 말을 던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말들에도 요즘은 무게가 실림을 느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 의사와 별개로 정해지는 자리가 늘어나고 있다. 가장 막내로 시작했던 독서클럽도 어느새 맏언니 격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요즘은 어딜 가나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 그러면서 말에도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그저 푸념하듯 가볍게 털어놓은 일상 이야기는 심각한 고민이 되고, 함께 논의하고자 의견을 제시하면 별다른 토론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결정된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나누다 무심코 '좋아 보이는데?'라고 지나가듯 가볍게 내뱉은 한마디는 '갖고 싶다'는 메시지로 전환되며 무게가 실린다. 그리고 그것은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배달되어 온다. 그럴 때의 난감함과 머쓱함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의식하지 않았다 해도 내가 하는 말에 은근한 요구나 지시를 담게 된 셈이다.

나름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며 친구처럼 지내고자 하지만 그와 별개로 세월이 주는 자리는 어쩔 수가 없는 거 같다. 그래서 요즘은 노력을 한다. 어색함을 면하려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연습. 지시나 요구처럼 느껴질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연습. 무심코 나왔다 해도 내게 나온 말은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과 무관하지 않으니 삶을 잘 추스르며 살아야 하리라. 평범한 내가 어쩔 수 없이 감당하는 무게도 이럴진대 특별한 자리, 공식적인 자리에 매달린 말의 무게를 말해서 무엇하랴. 우리 가슴을 열섬으로 만든 그 말들의 무게를 생각한다.

동백 옆 레몬나무에게도 속삭이듯 건네는 말. '열흘만 견디자. 곧 구월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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