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수년 전, 아마도 주말이라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전화가 울려 받았더니 노영민 의원이었다. 노 의원은 대뜸 "뭐해 저녁이나 먹지?"
갑자기 발생한 약속. 약간 귀찮기도 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유력 정치인인 노 의원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가 아니었다. 단 둘의 만남이었다. 노 의원은 지역 정치상황 전반에 관한 정치부 기자의 얘기를 듣고 싶어했다. 물론, 좋은 얘기만 하지는 않았다.
운동권 출신 현실 정치인
청와대 비서실장에 발탁된 노 대사는 1957년 11월 청주에서 태어났다. 청주 석교초와 주성중, 청주고를 졸업한 그는 197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2학년 때인 19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1979년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80년 복학생협의회장을 지냈고,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수배·제적됐다. 이후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 오산, 청주 등에서 노동운동을 벌였다.
노 실장이 청주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시기는 1995년이다. 1993년 통일시대민주주의 국민회의 충북지부 건설을 위한 논의모임이 구성됐고, 1995년 2월 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노 대사는 이때 공동대표를 맡았다. 1995년 창립된 민주개혁국민연합 충북연대는 남북 화해협력을 위한 민족화합, 국민통합을 과제를 실천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노 실장은 이때 이장섭 충북도정무부지사와 연철흠 충북도의원 등과 동지적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 실장은 2004년 5월 17대 국회의원 선거 청주 흥덕을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당선됐다. 이후 2012년 5월 19대까지 내리 3선에 성공했다.
2015년 말 시집 강매 논란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으며 불출마를 결정했지만, 당시 직접 인터뷰를 했던 기자는 지금까지도 사건 자체가 침소봉대(針小棒大) 된 측면이 많았다고 확신한다.
노 실장은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의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2017년 5월 대선에서는 조직본부장을 맡았다. 초대 비서실장에 거론됐지만, 주중대사에 임명됐다.
주중대사는 자칫 제때 귀국하지 못하면 현실정치에서 멀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권력은 지근거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 실장이 이번에 발탁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청와대 비서실장은 '꽃길'만 걷지 못한다. 오히려 가시밭길이다. 전임 이원종 비서실장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갈 수 있는 자리다. 오는 2020년 총선에 출마해 4선 중진의 반열에 오르는 것 보다 노 실장 개인의 입장만 놓고 보면 손해일 수 있다.
더욱이 권력이 집중되는 집권 초기가 아닌 후반기 비서실장은 자칫 설거지를 하는 입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더 낮은 자세가 필요한 법이다.
압구정(狎鷗亭)의 교훈
조선조 초기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든 청주 한씨 한명회. 뛰어난 지략가로 알려진 한명회는 계유정난을 통해 세조를 탄생시켰다. 권력의 정점에 섰지만, 말로는 비참했다. 그는 조용한 여생을 보내기 위해 한강변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세상과 선을 그으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권력의 주변에서 그를 놓아줄 리 없었기 때문이다.
노 대사도 마찬가지다. 중국에 있을 때와 달리 수천명이 줄을 설 수 있다. 이를 적절하게 제어해야 한다.
충북의 인사들도 이제 시(詩)를 좋아하는 노 대사의 넉넉한 말년을 위해 스스로를 경계하도록 협조해야 한다. 대신 낙향해 시를 쓰고 싶다는 도종환 장관과는 수시로 협업을 해야 한다.
운동권 출신이지만, 기업을 경영한 경험이 있는 흔하지 않은 사람. 극우·극좌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중도까지 포용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정치인.
생각이 다른 사람까지 포용하는 노 실장의 통 큰 활약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