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우리는 흔히 간신을 표현할 때 후삼국 시대 궁예의 책사 아지태(阿志泰)를 꼽는다.
'고려사'에 따르면 충청도 청주 사람인 그는 성격이 교활해 남을 속이고 아첨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궁예가 왕위에 오른 후 폭군이 되어 횡포를 부릴 때 옆에서 아첨을 일삼아 총애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鄭道傳)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다. 경상도 봉화 출신의 그는 과거에 급제한 22세에 충청도 충주에서 정팔품 사록(司錄)으로 관직에 입문했다.
정도전은 1384년(우왕 10년) 처음으로 이성계를 만났다.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와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된 셈이다.
정도전은 단양군 단양읍 도담리 도담삼봉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아마도 충주에서 관직을 시작한 그가 남한강 곳곳을 답사하면서 도담삼봉을 발견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정도전은 남한강 푸른 강물 한 가운데 우뚝 선 3개의 기암괴석 중 가장 높은 가운데 봉우리에 정자를 짓고 이따금 찾아와서 경치를 구경하고 풍월을 읊었다.
그리고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고 했다.
백성의 삶을 중시한 정도전의 삶
정도전이 더욱 돋보인 것은 바로 민본(民本)의 사상가였다는 점이다. 민본은 왕의 절대권력보다는 백성을 삶을 최우선으로 했던 철학이다.
정도전은 그러나 민본의 사상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강력한 왕권 국가를 열망한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1398년·태조 7년) 당시 끝내 제거됐다.
정도전 사망 600여 년 뒤인 2014년 4월 16일 인천을 출발해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 인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이 사고로 탑승객 476명 중 172명만 생존했고, 300여 명이 넘는 사망·실종자가 발생했다.
특히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4명이 탑승해 어린 학생들의 참혹한 희생이 발생했다.
세월호가 침몰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오전 10시를 전후해 국가안보실 등의 첫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서 TV를 통해 '세월호 침몰, 탑승객 전원구조' 자막이 전국에 중계됐다.
이후 박 대통령이 집무실 또는 관저로 돌아가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했다는 것이 청와대의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청와대 안팎에서는 박 대통령의 세월호 당일 행적에 대해 다양한 억측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국회 답변
논란의 발단은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국회 운영위원회 답변이었다.
그는 2014년 7월 7일 국회 운영위에 출석해 '당시 청와대에서는 못 뵈었습니까'라는 한 국회의원의 질의에 "청와대에서는 그날 뵌 일이 없고 그때 모시고…."라고 얼버무렸다.
'전원구조' 속보가 오보로 확인된 뒤 비서실장은 당연히 대통령을 만났어야 했다. 설령 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고 해도 비서실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았어야 했다.
김 전 실장의 군색한 답변은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놓고 '청와대 밖에서 정윤회 씨를 만났다.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 등의 각종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박근혜의 행적이 오리무중인 몇 시간 동안 정윤회와 애정 행각을 벌인 의혹이 있다'고 보도한 일본 산케이신문 문제는 양국 간 외교적 쟁점으로 비화됐다.
최순실 씨의 성형 전문 단골 의원의 원장이 세월호 7시간 동안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에게 성형 시술을 했다는 의혹이 최근 제기됐다.
세월호 참사 당일 '전원구조' 오보를 확인한 김 전 실장이 곧바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사태 수습을 진두지휘 했다면 상황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어쩌면 최순실 사태도 조기에 수습됐을 가능성이 높다.
종합할 때 김 전 실장은 박 대통령의 심기경호에 충실한 인물로 평가된다. 백성의 삶을 우선시했던 정도전과는 180도 다른 인물이라는 평가다.
어쩌면 '관심법'으로 혹세무민한 궁예의 책사 아지태의 처신과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