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업무 상 스트레스 때문에 가끔 담배를 피운다.
즐겨 찾는 종류는 'PARLIAMENT'다. 다행히 대학가에 위치한 집 근처 편의점에서는 '팔러먼트 푸른색'이라고 말하면, 알바 대학생들이 "아, 팔리아멘트요"라고 잘못된 정정을 하며 즉시 찾아준다.
하지만 고령자 등이 근무하는 대다수 일반 가게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레종,에쎄,메비우스,캐멀…. 어려운 '꼬부랑 글자' 중에서 제대로 찾아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소용없다. 결국 '답답한 놈'이 우물 판다고, 매장에 들어가 담배를 집어든다. 머쓱해하는 점원에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최근 인터넷에는 '편의점 알바 담배 이름 종류 외우기'란 글도 올랐다.
지역 특성 상 아파트 관련 기사를 많이 쓴다. 그런데 보도자료를 받다 보면 어려운 외국어나 외래어가 갈수록 많아진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영어 좀 한다는 카투사 출신인 기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용어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웨어러블 원패스 시스템'과 집안의 조명과 가스밸브, 난방 등을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인 '스마트홈 앱 2.0'…현관에 설치되는 '스마트 인포 디스플레이 2.0'이 원패스 시스템과 연동돼…." 탈북자들이 남한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어려운 외국어가 많은 현실'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진부한 우리말 이름' 얘기다.
정부가 2014년 8월부터 도로명 주소를 전면 시행하면서 우리말로 지은 길 이름이 많아졌다. 하지만 세종 신도시를 비롯한 상당수 지역에는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옛 이름이 적지 않다.
"누리로,나리로,다솜로,보듬로…." 언뜻 보면 아름답고 발음하기도 쉽다. 하지만 대부분 정부의 '도로명 주소 안내시스템'이나 포털사이트 지도 등에만 존재하는 '문서상 이름'일 뿐이다. 지역 특성이나 역사성, 마을 이름 등과 거의 무관하게 "순우리말로 짓자"라는 명분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예컨대 세종시 한솔동에 있는 '누리로'는 '세상'을 뜻하는 순우리말 '누리'에 길(路)이 합쳐져서 생겨났다. 하지만 옛말 누리의 뜻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늦은 감이 있지만 세종시가 '한솔길'로 바꾸기로 했다니 다행이다.
따지고 보면 지난 2006년 국민 공모를 거쳐 만들어진 '세종(世宗)'이란 도시 이름도 순우리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세종시에서는 길, 공공시설 등의 작명(作名)을 할 때마다 논란이 불거진다.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을 상징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우리말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극단주의자들 때문이다.
기자는 그 동안 세종시와 관련된 공공시설 이름 짓기 작업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최근에는 행복도시건설청 위촉을 받아 공공자전거 이름과 국립박물관단지 애칭 공모 심사 최종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 결과 탄생한 이름이 '어울링(공공자전거)'과 '아리지엄(박물관단지 애칭)'이다.
어울링은 우리말 '어울리다'의 어근에 영어 '링(Ring)',아리지엄은 사랑하는 님을 일컫는 고유어 '아리'에 박물관(Museum)의 뒷부분 '지엄(seum)'을 합친 말이다. 지역 특성을 살린 것은 물론 국제화 추세를 감안해 외국인들에 대해서도 배려했다.
하지만 일부 위원이 영어는 무조건 배제하자고 주장, 심사 과정에서 진통이 있었다. 아리지엄의 경우도 국제적으로 통용돼야 할 '애칭'이란 측면은 도외시한 채, '순수 우리말을 왜 쓰지 않느냐'란 맹목적 비판글이 잇따랐다.
컴퓨터 자판에서 한글을 쳤는데 영어가 입력될 때면 필자는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편했을까"란 생각을 가끔 한다. 설상가상으로 어려운 외국어나 진부한 옛말 때문에 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