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하고 있는 노원필(좌)·이기환씨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너무 많이 괴롭히고 학대했습니다"
청풍초 졸업생인 이기환(86)씨는 일제에서 광복을 찾은 8월15일 초등학생이었다. 그러나 이 옹이 지켜본 일제의 만행은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
이씨는 "일본인 교사들과 순경들이 한국인을 너무도 괴롭히는 모습을 봐왔습니다. 나보다 선배들은 매일 일본쪽을 바라보며 묵념을 올리기도 하고 천황 만세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옹은 "학교에서도 그랬지만 사회에서 공출을 할 때 쇠꼬챙이로 무른 땅을 쑤시며 곡식을 숨겨놓은 것을 찾아내 가져가지고 했고 우리 사람들을 폭행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교장과 교사중 일부는 일본인 이었다.
그는 "내가 학교 다닐때는 학생이 900~1천명 정도 있었다"라며 "금성면과 수산면 등지에서 학생들이 다니기도 했다"며 "간이 학교가 있었다. 간이학교에 다니던 2학년 학생들이 청풍초로 전학을 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초등학교때 군사훈련을 시켰다. 제식훈련도 하고 목총으로 훈련을 시켰다"며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하인보다 더 못하게 생각하고 부려먹었다"고 말했다.
"72년 대홍수가 아직도 머리에 남는다"
노원필(73) 옹은 1972년 여름 대홍수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노 옹은 "중학교 1학년때 6.25가 발발해 겨울 방학책을 타서 피난을 간 기억이 있다"라며 "부모님들과 함께 온 가족이 보은으로 피난을 갔다가 전쟁이 끝난후 돌아왔다"고 말했다.
1972년 대홍수때 많은 수재민이 발생해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 아직도 머리에 남는다고 하는 노 옹의 회상은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노씨가 말하는 청풍면의 전설에 대해 들어본다.
"수몰전에 청풍초 북서쪽으로 200m 지점의 강안에 신담마을이 있는데 신담은 새로운 담의 의미로 강둑처럼 담이 높이 쌓여있었다. 어느 날 도승 한분이 이 소문을 듣고 시주승으로 변복하고 연곡에 나타나 집 앞쪽으로 보이는 큰 개울을 막으면 더 큰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거짓 풍수를 알려주었다고 전한다. 큰 개울이란 현재의 금성면 상류쪽에서 흘러오는 속계라는 냇물로 당시 명성왕후의 친가가 번창 할 수 있었던 것은 집과 개울사이에 일사천리로 탁 트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믿고 친가에서는 강가에 높은 담을 쌓았고 이로 인해 가세가 기울었다고 전해진다"는 전설을 들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