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중인 담헌의 생가
문득 손님처럼 한가함이 찾아 왔을 때, 흔쾌하게 받아들여 호쾌하게 누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뜬구름 같은 인생에서 우연히 반나절 정도의 한가함을 얻는다면 무슨 일을 하면서 보낼까. 벼루에 먹을 갈아 화선지에 난蘭이라도 치며 여유를 즐긴다면 그 시간은 일상의 활력이란 보상으로 돌아와 풍요로운 삶을 꾸려 나가게 된다.
이런 풍류를 즐기는 꿈을 꾸지만, 그 또한 여건 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 기도가 이보다 간절하랴. 畵題「담헌 이하곤」서예작품은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수없이 자신을 쳐내며 마음을 닦았을 작가의 깊은 수양의 경지가 느껴져 덩달아 겸허해진다.
옛 사람을 그리며 먹을 끝없이 갈고 갈았을 작가의 집중력에 경의를 보낸다. 이 작품엔 설명이 없다. 다만, 조용히 작품을 응시하도록 유도할 뿐이다.
작가는 수백 년 세월 속에 먼지처럼 흩어진 담헌의 혼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그것을 붓 끝에 실어 수많은 작은 글자에 담는 고독한 작업을 기도처럼 해냈다.
그 글자들을 다시 모으고 모아 퍼즐로 맞추는, 작업의 성과는 국한문 혼용 큰 글자 열자를 이룬다.
큰 글자들을 해부하면 별 조각처럼 작은 글자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아아! 선비들의 절조가 무너진 지 오래 되었도다!'
당시 무너진 선비들의 절조를 한탄하는 담헌의 절규가 시공을 초월하여 돋보기 너머에서 직설한다.
한 획, 한 획마다 온통 담헌 혼이 수백 년을 지나 먹빛으로 화선지에 생생히 살아 흐른다.
한 사람의 넋을 담아내려고 먹을 갈고 갈았을 작가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그는 진정 담헌이 되고 싶기라도 했던 걸까.
바다를 먹물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면서 그리움으로 쓰고 쓰면 사람의 정서를 환기시키고, 마음을 정갈하게 하는 작품이 되는 걸까.
과거와 현재, 옛사람과 현대인, 고요함과 숙연함, 펄펄 살아 움직이는 작가의 숨결이 촘촘 배어있다.
각고의 정성으로 빚어낸 작품이기에 일상의 여유나 풍류를 넘어 우리정서를 정화시키며 감동과 울림을 준다.
옛 문인 담헌의 삶을 조찰해본다. 그는 어떤 삶을 살고 갔기에 수백 년이 지나서도 후대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한 작가의 혼을 이처럼 빼앗는 걸까.
이하곤은 우리고장 진천군 초평에서 태어났다. 21세에 진사과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생원과에도 합격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인 초평면으로 내려와 학문과 서화에 힘썼다.
조선의 진정한 선비였던 그는 지식에의 갈망이 얼마나 사무쳤던지 책을 파는 것을 보면 옷을 벗어 주고라도 책을 사들여, 그가 수집한 장서藏書가 1만 권을 헤아렸단다.
이에 사람들이 이하곤의 서고書庫를 만권루萬卷樓라고 불렀다.
담헌의 남다른 장서소장열정은 오늘 우리문화와 예술의 밑바탕이 됐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두타초頭陀草'등 수많은 시문집들뿐만 아니라 여러 그림에 대한 화평과 당대 중국 화가들에 대한 비평 등, 다양한 문체의 글들도 남겼다.
담헌이하곤의 문학세계는 자연유출 즉, 인간의 성정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표현하는 걸 목표로 했다. 표현 미학에서도 구애를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정경이나 상황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묘사하고자 했다.
개성과 사실성을 중시했는데, 특히 글씨와 그림에 탁월했다.
예술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그중미술에도 평면적 예술인 회화, 입체조형예술조각 등, 여러 장르의 미술세계로 나뉜다.
서예야 말로 인생과 내면, 취미와 열정, 공부와 서책, 학문을 닦는 일 등, 종합예술이다.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람의 정서를 토해낸 언어를 붓 끝에 담아 맘껏 휘두르며 표현하는 심오한 예술, 서예가 좋아졌다. 천년을 넘어 옛 문인과의 만남을 주선한 작가에게 머리 숙인다.
/ 임미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