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속된 말로 '좋은 학교를 나와서 출세하기 위해' 고향(영동군 추풍령)을 떠난 지가 올해로 37년째다. 그런데 추석이나 설같은 명절에 차를 타고 경부선 중간 부근인 고향앞을 지나다 보면 묘한 감정에 빠져드는 경우가 잦다. 이른바 '양가감정(兩價感情·ambivalence)'이다. 서울이나 대전같은 대도시 부근에서 주차장처럼 꽉 막히던 고속도로가 이 구간에 도달하면 상황이 180도 바뀐다. "언제 차가 막힌 적 있느냐"는 듯 도로가 시원하게 뻥뻥 뚫리니 짜증이 싹 달아난다.
하지만 이 감정은 잠시 후 '슬픔'으로 바뀐다. 바로 옆을 달리는 경부선 철도나 새로 놓은 국도4호선,일제 때 만든 구 국도도 마찬가지다. 달리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추풍령 통과 구간의 고속도로와 국도,철도는 "명절이나 주말,연휴 교통량이 많을 때에 대비하기 위한 교통 시설물"이다. 하지만 가슴 아프게도 이 구간은 세월이 흐르면서 명절 때 고향을 찾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든다. 좋은 학교나 기업이 없기 때문에 명절이 지나도 돌아올 사람이 없다.
물론 추석이나 설같은 명절 때 이땅에서 나타나는 '민족 대이동' 이 나쁜 현상만은 아니다. 문화전파(culture diffusion)나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에 기여한다. 1950년 이 땅에서 발발,동족상잔의 대비극을 물고 온 한국전쟁이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근대화에 상당히 기여했다고 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제외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명절 풍습인 '민족 대이동'은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훨씬 많다.
첫째,성인 자녀들의 경제적 부담이 너무 크다. 서울로 돈 벌러 간 자식이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머나먼 영·호남까지 가야 간다는 것은 크나큰 비극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경제가 안 좋은 시기에,한 가족이 길위에서 교통비로만 수십만~100만여원을 낭비한다는 것은 합리적 소비가 아니다. 부산 출신으로 서울에 살고 있는 기자의 사촌동생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명절 때 대부분 비행기로 부모님댁을 찾았다. 하지만 올해는 표를 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네 가족이 승용차로 부산까지 갔다. 추석 이틀 전날인 9월 28일 오후 6시 서울 마포를 출발했는 데 부산에 도착한 시각은 12시간 후인 다음날 오전 6시였다.
둘째,아내들이 겪는 '명절 증후군'이다. 장거리 운전의 경우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운전대를 남편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더구나 명절이 끝나고 귀가할 때는 대부분의 가장이 술을 한 두잔 걸치기 때문에 아내에 대한 운전대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 밤샘 고스톱 뒷치닥거리에다,제삿상 차리느라 파김치가 된 며느리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풍습 때문일까. 최근에는 명절 때만 되면 대도시 마트나 백화점 매장의 판매원 자리를 찾는 아르바이트 주부가 부쩍 늘고 있다고 한다.
셋째,환경오염이 문제다. 수천만명이 많은 차량을 타고 짧은 기간에 대이동을 할 때 방출되는 이산화탄소나 쓰레기 등 공해물질의 양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넷째,'비합리적 명절 보내기' 풍습은 국민들의 정신 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 장시간 운전을 하는 데다,극단적 교통상황을 많이 겪다 보니 운전자들의 신경에 극도로 예민해진다.
21세기 스마트 시대를 맞아 '민족 대이동'이란 말은 이제 이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뭘까.
기자는 '지역균형개발'이 조속히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현재 건설 중인 세종시,특히 지난달 15일 입주가 시작된정부세종청사는 매우 고무적이다. 수도권에서 세종시로 이사한 가족,서울에서 세종청사로 근무지를 옮긴 공무원들은 여느 해보다도 느긋하게 올 추석을 보냈다. '민족 대이동'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세종시에 있다.